두려워말라 오소희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의 말씀을 전해주실 때에 가장 먼저 "두려워 말라"고 명령하신다. 왜 그럴까? 당시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하였으며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으로 생각하고 죽을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메세지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두려워 말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며, 그가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평안과 생명을 주는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근원
두려움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매우 자연적이고 익숙한 속성이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려움이 아예 몸에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본능적인 성품은 아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인간이 얻게 된 암흑에 속한 성품이다.
처음으로 인간에게 두려움이 들어오게된 과정을 살펴보자.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8-10)
에덴 동산에 살았던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처음으로 한 행동은 두려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것이다. 그 이전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친밀하게 지냈으나,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자 이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죄를 통하여 인간을 지배하게된 마귀에게서 오는 성품이다.
두려움은 영적인 힘
흔히 두려움이라고 하면 겁을 내는 것, 혹은 무서워하는 감정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얼핏 생각하듯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두려움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난 부분에 불과하다. 두려움은 영적인 것이다. 두려움은 어둠의 주관자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영적인 힘이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두려움의 영(spirit of fear)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이 캄캄한 밤을 무서워하거나 수영을 가르치려고 하면 물에 빠져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의 두려움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영적인 세력이다. 두려움은 아이들이나 연약한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겁이 없는" 장정에게도 동일하게 두려움이 있다. 어린 아이 때 가졌던 두려움은 그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 질병에 대한 공포, 재정에 대한 공포, 실패에 대한 공포, 교통사고나 강도 등 재난에 대한 공포,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장래에 대한 공포 등으로 발전된다. 개인마다 두려움의 영역이 다르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공포를 항상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공포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깊숙히 침투하여 그가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에 영향을 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어떤 다른 사람보다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주입을 받는다. 물론 부모는 두려움을 아이에게 심어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그 자녀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걸으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부모는 안절부절못하여 "그러다 넘어져, 넘어진다니까" 라며 넘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다. 아니나 다를까 아기는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 "그 봐라, 내가 넘어진다고 했잖아"라고 하며 걸음을 시도하려하면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믿게 한다. 남자아이들은 자라면서 여러 가지 모험적인 놀이를 하기를 좋아하는데 부모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그러다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라며 야단을 맞는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반복하여 말하는 두려움의 언어는 셀 수 없이 많다. "찻길에 나가면 차에 치어 죽는다" "비 맞고 다니면 감기 든다" "말 안 들으면 경찰아저씨가 잡아간다" "여자애가 혼자 다니면 큰일난다".... 이 모든 언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의 영이다. 죽음이나 실패로 위협을 주어 자녀들로 하여금 무서워서 스스로 그와 같은 죽음이나 실패를 피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위협은 듣는 사람에게 실패하지 않고 잘 걸을 수 있는 길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지 실패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을 따름이다. 그 결과 "넘어지면 어쩌지"라고 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실패에 빠지게 된다. 공포는 사람이 무서워하는 바로 그것이 그의 인생에 이루어지게 하는 영적인 세력이다.
두려움은 이와 같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주입 받는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두려움을 저항하고 제거하는 일은 평생동안 그가 중독되어온 마약을 끊는 것과 같이 큰 결단과 집념이 필요하다. 두려움을 가볍게 생각하여 그저 간단히 해결될 문제로 생각한다면 마치 나는 담배를 피워도 끊을 수 있어 라고 하며 담배를 시작하는 젊은이와 같이 판단력 없는 생각이다. 두려움은 한 사람의 일생동안 날마다 주입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세상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를 공경해오는 영적인 세력인 만큼 날마다 그것을 의지적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람들은 흔히 두려움을 사랑이나 미움, 기쁨이나 외로움 등과 같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성품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저항하고 제거해야 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준다.
두려움의 뿌리가 제거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두려움에 관한 이와 같은 통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은 두려움의 근원과 그 정체를 드러내주며, 그것을 정복하는 방법 또한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준비한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누가복음 1:74-75)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마침내 인류는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 2:14-15)
인간의 두려움은 크게 가난, 질병, 재난, 그외 모든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가난에 대한 공포는 굶어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며, 질병에 대한 공포는 아파서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며, 재난은 사고로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인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심으로써 모든 공포의 뿌리를 제거해주셨다. 그 결과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대신 그의 자녀로서 친밀하게 그와 교제하며 그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인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는 모든 저주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믿음과 두려움
성경에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명령하신 구절이 일 백여 차례 넘게 나온다. 하나님은 인간이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잘 아신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딸이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명령하신다.(마가복음 6:36) 야이로가 그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결국 딸을 죽음에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딸이 육체적으로는 죽은 상태이나 그의 부모가 사망의 권세 잡은 자에게 딸을 내어주기 전에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움을 대적하고 오직 믿음을 지키면 딸을 죽음에서 다시 생명으로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믿음이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명하신 이유도 바로 두려움이 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제거해야만 믿음이 작용을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 가로질러 가던 중 풍랑을 만난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모른채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하여 죽을까봐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일으켰을 때 그는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40)
무서워할 때 믿음은 달아난다. 무서워하는 마음은 믿음이 없는 마음이다. 반대로 믿음을 지키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들어올 수 없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마음이다.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이다.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을 때 물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불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서 보호해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반면 순식간에 그들의 배를 뒤집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풍랑의 능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원리를 발견을 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마음인 반면, 두려움은 사탄의 거짓을 믿는 마음이다. 사탄은 풍랑이 왔으니 너희들은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풍랑 속에서도 너희들을 건져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에 보이는 풍랑의 권세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하였다. 두려움은 다름 아닌 죽음과 실패를 믿는 믿음이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의심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나면 왜 두려움을 제거해야만 믿음이 역사하는지를 알 수 있다. 두려움과 믿음은 죽음과 생명의 관계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두려움은 내부에서 거주하는 영이 아니라 사탄이 외부에서부터 주는 영이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생각을 불어넣음으로써 침투한다. 두려움은 사탄의 거짓, 곧 죽음과 실패에 대한 말을 반복해서 듣고 묵상함으로써 점점 자라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함으로써 믿음이 점점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두려움은 모든 실패의 근원
인생의 모든 실패의 근원은 다름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성경에 "악인에게는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임한다"(잠언 10:24)고 말씀하신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곧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이 바로 그가 실패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반복하는 동안 그 생각은 점점 강해진다. 결국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믿음을 억누를 만큼 강해지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물결을 따라내려가는 것이라면 믿음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려움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들어올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의 생각에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어떠한 위기를 당했을 때 저절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두려움에 말려드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였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반대되는 죽음과 파멸의 언어를 말하고 들으며 지속적으로 두려움의 영을 전파하고 있다. 그들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불행한 결과를 두려워함으로써 염려를 하고 있다. 염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생각을 반복하는 것이며,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점점 원하지 않는 결과를 상상하게 하고, 그 결과 점점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명령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명령과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