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神秘)란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움을 의미한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신비란 눈에 보이는 세계, 지각할 수 있는 세계를 초월한 세계를 말한다. 신비의 세계는 신령한 세계다. 미묘한 세계다. 신비의 세계는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그윽함의 세계다.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비의 본체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시다. 물론 어느 정도 인간의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만 믿고 신뢰해야 할 대상이시다. 하나님의 신비를 모두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진정한 지혜란 하나님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깊음에 있다. 오묘함에 있다. 측량할 수 없음에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 오묘하며 풍부하시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찬양했다. 과학은 그동안 신비의 세계를 파헤치는 데 주력해 왔다.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분석해 왔다. 그렇지만 과학이 어찌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과학자는 신비 앞에 머리를 숙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신비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신비는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신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 더 이상 놀라움에 멈춰서거나 경이에 넋을 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눈은 감겨버렸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는 신비에 대한 감사다. 신비의 세계는 경이로움의 세계다. 진정한 부요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 담긴 경이로움에 감탄할 줄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마차에 탄 한 부자의 예화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 부자는 불 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었다. 부자는 불빛 아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별들의 전경, 마부가 놓칠래야 놓칠 수 없었던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했다. 마부는 가난했지만 하늘의 신비를 누렸다. 반면에 부자는 마차 안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과학이 만들어 낸 전깃불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빛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가 흐려져 가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각은 경이에 대한 감각이다. 경이로움은 놀람이다. 신비 앞에 놀라는 것이다. 감격하는 것이다. 감탄하는 것이다. 봄이 찾아오면서 꽃이 피고, 호랑나비가 꽃을 찾아다니는 것을 본다. 나는 꽃과 함께 호랑나비를 관찰하다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말았다. 호랑나비의 신비로운 색상과 섬세함 그리고 그 움직임이 너무 신비로웠다. 하나님 외에 누가 그런 색상을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 외에 누가 그토록 섬세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 사람이 만든 것이 모두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익을 주는 많은 것들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실상을 보라. 처음에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 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 만든 것이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원자폭탄이, 원자력발전소가 인류를 두려움 속에 집어넣고 있다. 빠르고 빠른 인터넷이 인간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빨리 빨리’ 문화를 만들었다. 기다림의 맛과 멋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나누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 버렸다.
아브라함 헤셀은 감사치 못하는 마음(ingratitude)이야말로 현대 문명의 불협화음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무은(無恩, ingratitude)이 무경이(無驚異, no-wonder)와 관계있다고 한다. 경이의 감각이 소멸됨에 따라 은혜를 깨닫는 감각이 쇠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은혜에 감사하는 감각이 쇠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우리는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경이로움에 감동할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영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비로운 영성의 세계 속에서만 경이로움의 감각은 회복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신비롭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직 신비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는 신비로우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다. 오늘도 하나님의 신비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격하자. 그것만이 우리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요, 내면의 행복이다.
강준민 목사(LA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