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시키는 능력, 사랑” (전병욱 목사) 베드로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넘어졌다. 부활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왔다. 사랑의 터치로 넘어진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킨다. 회복시키는 능력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떤 것인가?
과거의 실수나 잘못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신다. 나는 이런 예수님이 좋다. 왕상19장에도 보면,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에게 사명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냥 먹이시고, 재우신다. 그래서 엘리야는 회복된다. 사랑의 어루만짐은 회복의 길로 이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교적 용서를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용서를 해도 꼭 토를 단다. “그때 왜 그랬어?” 납득이 안되면, 용서도 안되는 모양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다 납득해야 하는가? 다 따져야 하는가? 예수님은 묻지 않는다. 너 왜 배반했니? 왜 낙심했니? 아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냥 조반을 먹으라고 제안하신다. 주일에 예배드리지 않고, 놀러 가다가 사고 당한 사람이 있다. 심방이라고 찾아가서 회개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을 보았다. 회개는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깨우침을 주시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강요로 회개하는 예는 거의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다. 변화된 이름은 베드로이다. 그런데 시몬이라고 부르신다. 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목사라는 칭호도 때에 따라서 영광스러울 때와 수치스러울 때가 있다. 하나님께 잘 쓰임받고 있을 때, 목사 누구 누구라고 부르면 영광스럽다. 그러나 교통위반을 하거나, 질서를 깨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잘못했을 때, 덜 수치스러워할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시제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만약 과거로 물었다면, 추궁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나를 부인할 때, 나를 사랑했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지금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질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꼬투리를 잡으려고 질문한다. 즉 속에서 나쁜 것이 나오도록 질문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속의 좋은 것을 끄집어 내려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속의 사랑을 끌어 내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속의 믿음을 끌어 내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속의 은혜를 끌어 내려고 하신다. 이런 사랑 앞에 베드로는 변화된다. 변화를 보고 싶은가? 예수님의 사랑을 해보라. 나와 당신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같이 밥먹자고 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을 해보라.
나와 당신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