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8)
포도주이신 주님
중국은 넓다. 내가 살고있는 동북에서 서부 신강(新疆)까지는 기차로 밤낮 4일을 달려야 한다. 서장 티베트까지는 밤낮 5일은 족히 달려야 된다. 중국에는 56개의 소수 민족들이 살고있다. 남북 3,600Km, 동서 5,400Km나 되는, 우리 나라 국토면적의 50배가 더되는 드넓은 나라이다.
열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후대가 있다. 해면으로부터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8848m에 달하는 높고 낮은 지대가 모두 분포되어 있다. 사막과 초원, 고산지대와 평원이 반복되는 나라이다.
기차를 타고 달리면 너른 분지가 나타나다가 또 다른 협곡이 나타나고 또 너른 분지가 반복된다. 새로운 분지를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의 풍물과 지형이 나타나며 풍속이 달라진다. 각기 다른 여러 개의 나라들이 연속되어 눈앞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중국여행은 매일매일이 새롭다. 산물도 풍성하다. 열대에서 한 대에 이르는 과일이며 산물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시장에 나온다. 영하 30도가 넘는 하얼빈에서 한 겨울에도 신강에서 가져온 거봉 포도들을 값싸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돈으로 1Kg에 700-800원이면 살 수 있는 포도송이가 얼마나 탐스럽고 큰지, 그리고 얼마나 달콤하고 맛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선지 중국에는 이들 지방에서 생산하는 값싸고 질 좋은 포도주들이 많다.
하얼빈에서 신강 우루무치까지는 특급열차로 84시간이 걸린다. 신강성은 회족자치주로 주민의 대부분이 아랍계 회교도들이다. 상당한 면적이 사막으로 덮여있으나 중국에서 최고의 포도를 생산하는 곳이다. 포도는 모래땅에서 잘 자란다. 그 가운데 사막 가운데 자라는 포도 맛이 가장 뛰어나다.
신강은 포도를 원료로 하는 포도 과자류, 건포도, 포도주스, 포도주 등 포도와 관련된 산업이 특별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별한 것은 이스라엘과 풍속이 같은 아랍계 주민들이 많아서 옛 이슬람과 유대교에 연관된 사실들이 남아있다. 중동지역의 풍습과 습속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언젠가 집회 중에 포도주를 따르면서 포도이신 주님, 포도주이신 주님을 간증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신강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해 보기를 권하였다. 마침 신강 우루무치의 어떤 신실한 형제의 집에 혼인식이 있어 초대받아 가는 형제의 뒤를 따라 나섰다.
혼인식 전날 도착했는데 신부집인 형제님 댁에 신랑집에서 포도주 한독을 보내왔다. 그것을 받아드리는 행사가 각별하게 눈에 띄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랑집에서 사주단자를 넣은 함을 보내는 행사가 시끄럽게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잘 익은 포도주 한독을 보내오는데 그의 행사가 각별하고 의미가 깊었다. 그리스도인 집안에서는 혼인식 전날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포도주 한독을 보낸다는 것이다.
같이 가신 형제님 말씀이 저 포도주는 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한다. 신랑집에서 주님을 신부집으로 보낸 것이란다. 무슨 뜻일까? 다음 날 포도주를 담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나는 포도주이신 주님을 직접 마실 수 있었다.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이 해 뜨기 전, 들에 나가 포도를 따야 한다. 그래야 포도가 싱싱하다. 그리고 나서 해가 뜨고 햇살이 강한 9시부터 10시 사이에 빨래 줄과 같은 곳에 포도를 널고 장대로 바쳐 높이 메달아 둔다. 햇살이 쨍쨍한 한 낮을 지나 오후 햇살이 약해지는 3-4시 사이에 포도를 내린다(과학적으로 강한 햇살은 포도가운데 충분한 태양에너지를 고정하는 것임).
그리고는 긴 나무에 넓고 깊이 판 홈(凹)에 말린 포도를 옮겨두고(포도즙 틀을 말함) 또 하나 긴 나무에 볼록하게 나오게 만든 수컷(凸)을 위에서 엇 빗겨 눌러 포도를 으깨는 것이다. 포도를 으깨는 모양이 마치 십자가 틀을 연상하게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다. 주님은 오전 10시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4시까지 포도즙 틀에서 으깨심을 당하셨다. 포도 또한 한낮에 장대높이 달렸다가 오후에 내려져 포도즙 틀에서 으깨어지는 것이다.
포도즙 틀에서 으깨어진 포도는 서늘한 지하실에 둔 돌로 만든 포도주 통으로 옮겨진 후 3일을 지낸다. 그런 다음에 다시 참나무 통으로 옮겨 49일을 숙성한 다음 50일 만에 포도주를 뜬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하의 차가운 암석가운데의 묘실로 옮겨져 3일 동안 계시다가 부활하시고 50일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순절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신 하나님이시다.
포도주를 가득 담은 포도주 통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풍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신랑이신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 되시어 50일 후 우리 가운데 생명을 분배하러 오신 것과 같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포도주를 보내는 것은 생명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혼인이라는 것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분배하고 번식하기 위한 행사가 아닌가.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주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주신 주님이셨다.
혼인식 전날 밤 신부 집에 모인 하객들을 위해 주인 형제님은 신랑 집에서 가져온 포도주 한잔씩을 분배해 마시게 했다.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가 터져 나왔다. 포도주이신 주님을 마신 것이다.
혼인식에 나타나신 주님
혼인식은 말 그대로 잔치였으며 주님이 생명을 분배하는 곳이었다. 주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신 곳이 가나의 혼인잔치 집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중국 그리스도인 가정의 혼인식은 세상의 혼인잔치와 너무나 달랐다. 중국의 일반 가정의 혼인식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랑과 그의 친구들이 아침 일찍 신부집 앞에서 벤드를 연주하여 떠들석하게 한 다음 신부를 예식장으로 모시고 가는 것만 다르다. 하객을 위한 잔치도 같으며 특히 혼례식 때 가지고 갈 예물은 각별하게 준비한다. 요즘은 모두 현금이지만 적지 않은 돈을 붉은 봉투에 넣어 준다. 돈은 그 사람의 성의와 우정을 상징한다. 그러한 중국 땅에서, 나는 그리스도인 형제의 혼인식에 축의금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조금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어느 곳에도 축의금을 받는 곳이 없어 한참을 눈치를 보아야 했다. 중국의 그리스도인 가정의 혼례식에서 축의금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 분들은 혼인식 전 주일날 집회에 나가 혼인식을 치르는 형제의 이름 앞으로 축하헌금을 한다. 그러나 누가 얼마를 냈는지 이름을 적지 않고 낸다. 세상의 돈으로 형제들간의 어떤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축의금 봉투에도 커다란 자기 이름과 돈의 액수를 적어 바벨탑을 쌓는다. 지금 얼마를 주었으니 나중에 참고하라는 뜻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할지는 모르지만 품앗이라는 말도 있다. 교회에 낸 축하헌금은 모두 합쳐져 혼인식전 교회의 이름으로 혼인집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실행이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혼인식 절차이다. 주례를 하는 사람이 없다. 단지 사회를 하시는 형제 한 분이 나오셔서 오늘 주님을 주례로 모시고 양가의 친지와 친척, 형제 여러분을 증인으로 모시고 혼인식을 하는 것을 주님께서 거룩하게 분별하게 해 주시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찬송이 있고 말씀으로 혼인식을 이끈다.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입장하면 그 뒤를 따라 양가의 부모가 또한 손을 잡고 같이 입장한다. 혼인서약은 성경 위에 신랑 신부가 손을 얹고 자신의 입으로 주님과 교회, 증인되는 모든 사람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혼인식 절차표를 얻어 그대로 번역). “저 신랑 000는 주님과 교회 앞에 내 사랑하는 신부를 평생의 배필로 맞음에 있어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고 보살피며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길 것을 서약합니다. 저 신부 0000은 주님과 교회 앞에 내 사랑하는 신랑을 평생의 배필로 맞음에 있어 주안에서 복종하며 말로 아니하고 행위로서 순종하며 선을 행하고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으며 나아감에 흐트러짐이 없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소중히 여길 것을 서약합니다“. 그리고 나면 사회자는 “오늘 주님을 주례로 모시고 여러 친지 가족 여러분을 증인으로 하는 가운데 이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며 한 몸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귀하고 소중히 여길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의 이름으로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교회와 모든 믿는 이들과 가족 친지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라고 혼인을 선포한다. 이어서 신부부모가운데 하나가 시집가는 딸과 사위 그리고 신랑부모, 가족에게 부족한 여식을 용납해 주셔서 고맙다는 간절한 부탁과 간청이 있고 신랑부모의 화답이 이어지는데 찬송과 눈물 바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주임형제의 축복의 기도가 있고 전체가 혼인을 찬양하는 찬송이 이어진다. 예식은 엄숙하고 근엄하다. 시장바닥과 같은 여느 나라의 풍속과는 다르다. 이어서 신랑친구를 대표하는 사람과 신부친구를 대표하는 사람이 나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며 교회의 메시지가 반포된다. 마지막에 교회의 형제가 나와 이들을 축복하는 말씀을 연다. 혼인의 의미와 새로운 가정의 역할 주님의 경륜을 선포하고 이들을 위한 시와 주님의 축복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시가 연속된다. 너무 너무 아름답다. 찬송시 사이사이에 “셀라” “셀라” 하는 사이 음은 새로운 느낌이다. 한마디로 잔치이다. 마지막 신랑신부가 나서 오늘 오신 분에 대한 하례인사를 하고 두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양가의 부모와 친척, 교회를 향하여 다짐을 선포한다. 모든 사람의 선포가 주님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다. 하객으로 참여하는 구원받지 못한 일반인들의 얼굴에도 상기된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분된 모습을 본다. 혼인식은 사람이 아닌 주님이 이끄셨다. 주님이 나타나시고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포도주로 우리를 즐겁고 흥겹게 하셨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을 흥겨운 잔치집으로 바꾸신 주님이 이런 주님이 아니셨는지 싶을 정도였다. 나의 혼인식 전체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결혼식에 가는 것이 그간 와 준데 대한 답례나, 나 왔습니다 하는 눈 도장이나 찍으러 오는 그리고는 곧바로 식당으로 직행하여 밥이나 먹고 가는 그런 혼인식이 아니었다. 진지하고 축복의 말씀이 있는, 주님이 물로 직접 포도주를 만드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혼인식 자체를 식장을 빌려하지 않는다. 양가의 친지 친척과 참가하는 형제들의 수에 맞게 좌석을 갖춘 아담한 식당을 빌려한다. 형제들의 말을 빌리면 혼인식에 오시는 분들에게는 축의금을 받지 않는 대신 식장을 빌리는 돈으로 음식을 차린다는 것이다. 식이 끝나면 모두 앉아있는 상에서 음식을 즐긴다. 양가의 부모와 신랑신부가 돌면서 음식을 권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자리이다. 식에 오는 하객마저 신랑 측 신부 측으로 나누어 돈을 샘하는 세상의 결혼식과는 너무 다르다. 메뚜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나는 중국을 떠나 한국 땅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생겼다. 마음에는 결코 그곳을 떠나 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춥고 거칠고 먹고사는 생활이 어렵고 고되다 하더라도 주님이 계신 그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이런 곳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떠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돌아오기 며칠 전 나는 노 형제님을 뵈었다. 돌아가 어느 곳에서 주님을 예배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내가 다니던 그 곳은 정말 가기 싫었다. 세계 어느 곳에도 그런 교회가 없다는 말을 나도 했지만 그곳은 바알을 섬기는 곳이었고 사망이 가득한 곳이었다. 할 수만 있으면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야곱의 삶을 보세요. 야곱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모두 주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님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주님만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인정에 메 달려 내 교회, 내 집, 내 식구를 고집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세상의 썩어질 것들의 대표적인 곳들이며 거기에 붙들려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시며 잠언 30장의 메뚜기의 비밀을 하직인사로 주셨다.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가는 메뚜기와 라는 내용이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 30:24-28) 메뚜기는 임군이 없지만 모두 떼를 지어 나르는 곤충이다. 형제님은 내게 메뚜기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나는 메뚜기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메뚜기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동물이다. 떼를 지어 몰려와 자기 주변의 먹을 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먹을 곳을 향하여 일제히 뛰어 나른다. 계속 먹을 양식이 있는 곳을 향하여 뛰어가는 것이다. 우리도 어느 곳에 머물러 음식(말씀)을 먹고 먹을 음식이 없으면 다시 먹을 음식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음식인 주님을 향하여 돌진하는 메뚜기에게 많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사람은 내가 사는 곳,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은 곳, 내가 다녔던 교회 등 익어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자기가 머물던 곳에서 계속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것이다. 사람과 체면을 중시하여 그 자리에 엉거주춤해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먹을 것이 없다면 다시 먹을 것을 향하여 뛰어 날아가는 메뚜기가 되어야한다는 권면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와 예전 내가 다녔던 교회에 가 보았을 때 그곳은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텅 빈 창고였다. 영원한 음식이신 주님 대신 썩어질 인생들의 자랑들만 난무하였다. 여전히 그 분이라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난 서슴없이 먹을 음식이 있는 곳을 향하여 뛰었다. 예전의 얼굴과 친분, 체면 그것은 나를 먹이는 음식이 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난 어느 곳에 머물고 있다할지라도 먹을 음식이 없다면 다시 음식(주님)이 있는 곳을 향하여 뛰어 오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서슴없이 달려가는, 누가 가자고 해서 가는 그런, 임군이 없는 메뚜기 떼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이끌어 가는 임군이 있어서 달려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메뚜기 떼가 되어야 한다. 현재 내가 다니는 나를 알아주는 교회, 과거 나의 열정과 노력이 쌓여 있는 교회, 내가 무엇인가를 알았고 많은 것을 배운 교회, 미래 나의 신앙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이 교회가 내가 머물러야 할 이유는 아니다. 언제나 미련 없이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생활이 나의 신앙생활이다. 메뚜기는 먹을 것을 찾아 주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동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배로 기어 다니는 동물은 부정하다고 하셨다. 먹을 것을 채울 배를 위해 사는 동물은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다. 메뚜기는 기어 다니는 부정한 동물이 아니다. 앉은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바로 튀어 오른다. 뛰는 다리가 있어 하늘로 튀어 올라 날개로 하늘을 나르는 동물이다. 멀리 날아가지는 못한다. 단지 멀리 뛰어갈 뿐이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두르고 뛰어 오른다. 그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이 땅에 있지 않다. 메뚜기의 특징은 뛰는 뒷다리에 있다. 우리 또한 뛰어오르는 뒷다리가 필요하다. 주께서 지혜로운 작은 것들이라고 하셨다.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레 11:20-23) 주님은 메뚜기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정한 동물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지금 한국에 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다. 나는 메뚜기임을 간증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두 번을 뛰어 올랐다. 그리스도인이 해먹고 살게 따로 있다고 하시는 주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편안할 수는 없다. 세상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 그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이다. 현재의 우리 삶은 잠시잠깐 후 다가올 영원한 우리 집을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다. 그런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 먹고 살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로 다가온다. 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때,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살지? 라는 생각이 나를 눌렀다. 그런 의문으로 안절부절하고 있는 중에 노 형제님에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다. 내게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정말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 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아무 것이나 하면서 살수는 없다는 것이다. 해먹고 살게 따로 있다는 말씀이다. 형제님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했는지 안다면 세상에 나가 우리가 무엇을 해먹고 살 것인가의 의문에 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재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재물은 열납하셨으나 카인과 그 재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카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라(창 4:2-7) 며칠을 두고 창세기의 관련구절을 읽어보아도 내 둔한 머리에는 잡히는 것이 없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을 열납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간 배운 성경지식을 이용하여 아벨이 바친 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답은 어쩐지 시원치 않았다. 레위기에 있는 것과 같이 어떤 것은 먹지 말고 어떤 것은 먹으라고 그렇게도 친절히 알려주시는 분이다. 일언 반구없이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으니 내가 카인이라도 아벨을 그냥 탁 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라니 무엇이지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리고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카인은 농사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양치는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양밖에 없으므로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고 농사하는 자는 가진 게 땅의 소산밖에 없으므로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무엇으로 제사를 드렸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제물은 그들의 직업이 원인변수가 되어 발생한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의 직업이 아벨과 같은 양치는 자라면 나의 제물 역시 하나님께서 열납할 터이요 거꾸로 카인과 같은 농사꾼이라면 카인처럼 버려질 것이다. 문제는 나의 직업이 무엇인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직업을 가졌고 아벨은 농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아벨의 직업이 ‘양치는 자’라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모두가 아담의 직계자손 1대 혹은 2, 3대들...그들은 장수가족들이기 때문에)에게는 희한한 일이다.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사람들은 전혀 고기(동물)는 먹지 않았고 식물만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벨이 양을 치는 목자가 된 것은 잡아먹기 위한 식용 양을 키운 것도 아니다. 양가죽을 만들어 옷 장사를 위함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더불어 살게 되어있다. 돈이 좋으면 미우니 고우니 하면서도 돈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명예가 좋으면 또 그대로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직업은 이러한 관심이 나타난 결과이다. 아벨이 양치는 자였다는 얘기는 죄인 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충분히 인식했고, 자신의 죄를 구속할 구속 주, 곧 어린양의 필요성을 절감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카인과 아벨은 오랜 기간동안 그 부모인 아담과 이브와 더불어 살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같이 살면서 그 부모로부터 에덴동산으로부터 쫒겨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의 가죽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려 주셨다는 얘기도 들었을 것이다. 양심이 살아있는 아벨은 그 죄를 씻는데 하나님께서 그 부모에게 하셨던 것처럼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양을 좋아하고 양으로 더불어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양치는 자는 양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양이 자신의 전 인생이요 의미이며 삶인 사람이다. 아벨은 이러한 양의 제사를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산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이 자신의 일이 되고 직업이 된 사람을 말한다. 아벨이 양치는 자였다는 것은 아벨이 바라고 소망하는 대상이 양이었다는 말이고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이다. 즉 아벨이 더불어 살았던 양은 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믿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카인이 제물로 바친 땅의 소산이 무엇인가? 아담의 타락은 땅에 저주를 가져와 하나님의 창조 속에 들어있지 않던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땅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카인이 하나님께 바친 것은 가시와 엉겅퀴였던 셈이다. 카인이 농사꾼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카인 자신이 가시와 엉겅퀴를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직업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중히 여기느냐(마6:24)의 결과일 뿐이다. 카인은 가시와 엉겅퀴를 좋아하여 그것으로 더불어 살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인은 양이라는 믿음은 없으면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카인은 토색하지 아니하고 불의, 간음하지 아니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들은 양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다. 가시와 엉겅퀴와 더불어 사는 생활이었다. 하나님을 찾아 무엇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은 믿음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런 행위들이 곧 가시오 엉겅퀴이다. 아벨은 양과 더불어 그 실제를 살아낸 사람이지만 카인은 지식적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생활에 실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 특히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는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할 문제이다. 직업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나타난 직업은 보이지 않는 깊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돈을 다루는 일을 한다면 분명 속에서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업으로 하여 먹고사는 것이다. 땀흘려 일하고 정당한 이익을 얻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하는 일이 턱없는 말로 다른 사람을 미혹케 하여 내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카인의 직업이 나의 직업이라면 나 역시 카인과 같은 사람이요 아벨의 직업이 나의 직업이라면 나 또한 아벨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3번 자리를 옮겼다. 권세가 있던 곳도, 돈이 있는 그런 곳도 있어 보았다.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러면서도 외식이 가득한 곳에서도 일해 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그곳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럴 때마다 난 주저 없이 자리를 옮겼다. 그것은 주님의 확실한 인도였다. 나에게는 배고픔이 없었다. 갈함이 없었다. 주님이 항상 같이 하셨다.
무엇을 할것인가?
직업은 그가,,품은 결과다.....
직업도 선택인데....어떤 목적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하나님의 뜻에 가까운,,직업을 갖을수있구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