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외인묘지(楊花津外人墓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8
크기 : 면적 1,000평(원래는 1,400평이었으나 지하철공사로 400평 잘려나감)
전화 : 02)334-0384


일반적인 개요

  이 묘지가 처음 조성된 것은 1885년 6월 미국 장로교의 의료선교사(醫療宣敎師)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J.W.헤론(1856~1890, 한국명 蕙論)이 1890년 전염성 이질로 사망하자 그의 묘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였는데, 당시 서울의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외국인의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허락을 받았다.
 
이후 이곳은 한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한 외국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한말(韓末)과 일제 강점기 및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이 묘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에 황폐하였던 묘지는 주한(駐韓) 외국인들의 모금운동으로 새롭게 가꾸어졌지만,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외면당하였으며, 6․25전쟁 때에는 이 부근이 격전지로 변하는 바람에 묘지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500여 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연세대학을 세운 H.G.언더우드의 부인 L.S.홀튼 여사와 그 아들 원한경(元漢慶) 박사 부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운 H.G.아펜젤러 2세(배재학당 제5대교장)와 딸 A.아펜젤러(이화여전 초대교장), 제중원(濟衆院)과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세운 J.W.헤론과 평양 선교(宣敎)의 개척자 W.J.홀 및 그의 부인으로 한국에 처음으로 맹인학교를 세우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운 L.S.홀, 숭실대학 설립자 W.M.베어드(1862~1931, 한국명 裵偉良)의 묘도 있다.
 
그리고 1992년에는 홀의 아들이자 한국에 결핵요양원을 처음 세운 S.홀이 이곳에 묻혔다. 이 밖에 한말 언론활동을 한 베셀(한국명 裵說),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벌인 헐버트의 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외국인들의 묘지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개신교에서는 1984년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이곳에 한국선교기념관을 세움으로써 개신교 성지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최초의 매장 선교사 <J.W 헤론>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발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 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헤론은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에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고,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순교자들의 비명(碑銘)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 R. 켄드릭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봉의 높이도 높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 책망받던 바리새인들의 비유와 같이 평토장한 무덤같아 보여 쓸쓸하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게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기만 하다. 이들의 휴식은 하나님 크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땅에서의 안식이다.
 
그러나 이들의 안식이 평온하지 만은 않은 듯 싶다. 전쟁과 그 포화의 흔적들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대신한 돌 십자가들이 모진 세월 속에서 십자가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손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받았으며, 또한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한국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


<양화진에 잠든 주요 선교사들>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 출생, 1872년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 조선은,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버트 목사님으로부터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너는 왜 못 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다. "그렇다 왜 나는 못 가는가?"
그는 또 한번의 희생을 치르기로 하였다. 그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 말을 배우고 준비해 놓은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한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였고,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는데 한국 교회는 이날을 최초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려운 조선 말을 열심히 배웠다. 언어의 은사가 있는 그는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조선말을 잘 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하여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번역 위원으로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근대 한국 교육사업에도 큰공을 세웠는데 한국에 온 다음 해인 1886년에,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웠고, 이어 고아학교를 창설했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후에 서울의 경신고등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대학 창립을 마음에 계획하고, 연희전문대학을 세웠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연세대학교이다.
1887년 9월 27일,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14명이 참석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첫 예배였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그 교회 첫 장로가 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서상륜과도 끊이지 않고 연결하여 그를 통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한국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총각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와서, 28세가 되던 해 자기 보다 8살 연상인 아름다운 의사, 릴리아스 홀톤과 결혼을 하였다. 언더우드의 신혼여행은 상당히 흥미가 있다.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계획하고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그가 머무는 곳마다, 조선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양사람들을 처음 보는 조선사람들은 모두가 신기하여 머리카락을 만져 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 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곤혹스러운 것은, 밤마다 신혼 방에 구멍을 뚫고 쳐다보는 바람에 혼이 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31년간 사역을 하면서,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가 발진티푸스병이 악화되어 1916년 4월 요양 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9년 5월 그 동안 미국에 묻혀있었던 언더우드의 시신이 이장되었는데 언더우드 목사님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ꡒ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뉴욕근처 작은 교회에 묻혀 있던 시신을 한국으로 옮기자는 친지들의 의견이 많았어요 할아버지의 한국 사랑의 정신을 기리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할머니는 그 이장비용으로 차라리 한국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반대의견을 내셨어요ꡓ
결국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였던 릴리아스의 뜻에 따라 한국에 유치원이 세워졌고, 그 후 이장문제는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다가 연세대학교의 배려로 1999년 5월에 이곳 양화진으로 이장을 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은 지금 5대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가족들이 묻혀있을 뿐 아니라, 그 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손자, 증손자의 빈(예비) 무덤이 함께 있어 더 큰 감동을 준.

아펜셀러(Appenzeller) 선교사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 출생.
아펜셀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다. 그는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 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아펜셀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 
그 날도 아펜셀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된다.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셀러 선교사는 즉시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준다. 그가 소녀를 건지고, 힘이 빠져, 지친 상태로, 겨우 배에 매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파도에 휩쓸리어 실종되고 말았다. 44세의 짧은 생....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 바치고 갔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이고, 그가 세운 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제 중 고등학교이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는데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하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에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대 최초 한국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하는 가슴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게 된다. 그는 6. 25 전쟁때 우리 민족을 위해,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게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해 주면서, 수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헨리 다지 아펜셀러 선교사는 아버지가 못 다한 그 사역을 감당하면서, 죤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된 땅,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선교사들이 묻힐 때마다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 아펜셀러 선교사를 생각하였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도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면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꼭 한국 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의 유언 중에 이런 유언이 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펜셀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맞은 편에는, 1950년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다.
 
스크랜톤(Scranton) 선교사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개척자로 여성교육의 장을 열어 준 분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젊은 선교사였으나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는 50이 넘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들어왔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왔고, 매리 스크랜톤 선교사는 바로 그 뒤를 이어, 아들과 며느리, 전 가족이 1885년 6월 20일 내한하였다.
그들은 알렌이 세운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에서 일하면서,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예배가 드려진 곳이 알렌 선교사의 집이었는데, 그 때, 첫 예배의 일원으로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당시 조선조정은 강력하게 포교활동을 금하고 있었는데 누구보다도 50이 넘어 온 메리 선교사님의 가슴은 복음으로 뜨거웠지만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선교사들에게 의료사역과 교육사업의 문은 열려져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큰 집 한 채를 사서 교육사역을 시작하였다. 학생을 모집하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매리 선교사님은 길에 버려진 여자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고, 공부를 시켰다. 이 학생이 이화여자 대학의 첫 학생이 된 것이다. 1886년 5월 31일부터 학교사역을 시작하였고, 1887년 민비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학교명을 하사 받았다.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는 로드 웨일러 선교사에게 학교직을 인계한 후 본격적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여선교회를 조직하고 여성순화선교반을 창설하여 여러 지역에 전도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별히 천민을 상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었다. 얼마 전에 SBS TV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그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왔던 선교사가 바로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이다.
그녀의 아들 스크랜톤 선교사도 제중원에서 의료사업을 시작으로 정동병원을 개원하였고, 동대문 부인 전문병원을 설치하였다. 상동으로 이전 상동병원을 설립하였고, 상동병원 내 상동교회를 설립하여 조선 선교의 장을 멋지게 열어갔다.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는 아들과 함께 한 평생을 다 드려 한국 선교에 헌신하신 분이며, 77세의 나이로 소천하여 지금 양화진에 안장되어있다.

로제타, 윌리암 제임스 & 셔우드 홀 선교사
(Rosetta, Sherwood & William James Hall)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윌리암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도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온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어쩔 줄을 몰라하다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저 선교지를 바꿔 주시면 안되나요?...”라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된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 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그는 한국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양화진 죤 해론의 묘 옆에 묻혀 있다.
홀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로제타 선교사는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중 홀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하겠다.
“내 사랑하는 오빠가 발진디프스의 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떤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우리의 희망을 사라졌어요....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나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어요.... 언니는 집으로 오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어린 셔우드 홀을 보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윌리암 제임스 홀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왔다. 조선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다.
박점동 이라는 한국 여자 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다.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들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  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일본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였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엔 벌금형언을 받았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쫏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쫒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I a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카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다.

헐버트(Herbert) 선교사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 하였다.
고종황제는 열강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헐버트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는데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백악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여 1949년 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떠나서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항상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인 86세 때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으나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재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사랑의교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