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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본드
2013.01.20 16:41:11 (*.183.184.240)
1056

오늘 섬기는 교회 목사님의 행복에의 3번째 말씀은 "듣지 말았으면 좋았던" 말씀이었습니다

나가는 길에서도 목사님께 드렸던, "오늘 말씀 너무 어렵습니다"는 고백처럼 ...

설교를 들으며, 써핑하였던 인터넷 내용의 잔영이 여전히 제 마음에 파도쳐 옵니다

다시 인터넷을 찾아보며, 가장 그 내용이 다 포함된 글을 전재해 옵니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까지 한 말씀이지만, 저희 모임에서도 올 한 해 그 어떤 사역보다도 핵심 순장 양육과 함께, 우리 자신의 순결한 삶을 위해 매진하기로 하였는데, 목사님의 지난 주 말씀 "의뢰에서 신뢰로"와 함께 뚜벅뚜벅 주님 가라 하신 길 가보렵니다~

베트남 소녀 킴 푹이 모든 것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생명을 살린, 관련된 전재된 글인데 한 번 보시지요~

베트남 소녀 킴 푹(Kim Phuc 1963~) 용서와 화해 Spiritual Journey

2010/05/18 15:25

복사http://blog.naver.com/panem/7008624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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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18...

비극의 역사들...

전쟁, 혁명...

외침과 아우성과 눈물과 피와 죽음....

증오와 분노의 기억들....

풀리지 않는 한(恨)과 맺힘과 원통함과 억울함과....

짓눌린 세월의 악몽과 아직도 생생한 그 외침들....

그리고 용서와 화해와 평화....

용서, 화해...

.......

.......

판 티 킴 푹(Kim Phuc 1963~)

어쩌면 전쟁의 비극 사진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던 사진,

1972년 6월 8일,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Trang Bang) 마을, 미군 전투기 폭격

닉 우트(Nick Ut)-당시 21살의 베트남 출신 AP통신 사진기자가 촬영 후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

이 사진은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Life지에 실렸고 1973년 닉 우트(Nick Ut)는 퓰리처 상을 수상.

현재 결혼 후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진의 주인공 소녀 킴 푹(Kim Phuc 1963~)의 스토리, 그녀가 펴낸 책, 용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만들던 음식 냄새, 7남매가 함께 살던 커다란 집, 큰아버지의 웃음소리, 안뜰에 있던 과일 나무들, 학교 친구들, 내 이름 '푹'은 '행복'이라는 뜻이다. 나는 행복한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했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닥쳤다. 우리 가족은 유일하게 '안전한' 피난처였던 근처의 탑 안에 사흘 동안 숨어 있었다. 비행기가 그 성소를 폭격하려 하자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나와! 뛰어!" 나는 겁에 질려 사촌들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탄 네 개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네이팜탄이 사방에서 터졌고 내 몸에 격렬한 불꽃이 옮겨 붙었다. 내 옷과 살갗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발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달릴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농 콰! 농 콰! 너무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1972년 6월 8일의 일이었다. 나는 아홉 살 소녀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6월 8일,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Trang Bang) 마을에 네이팜 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전날 밤 12시경, 베트공 '해방 전선' 병사들이 트랑 방 마을을 급습, 점거했다. 때문에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공 사이에 마을 쟁탈전이 벌어졌다. 정부군은 중화기로 마을을 포격했고, 베트공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투가 길어지자, 오후 4시경, 정부군 여단장은 마을을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미군에 폭격을 요청했다.

이에, 미군이 함상 공격기인 '스카이 레이더'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고, 마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3000℃의 고열로 반경 30m 내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끔찍한 폭탄에 마을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와 불꽃에 휩싸였다. 주민들은 쓰러졌고, 평화로웠던 시골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이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아나던 벌거숭이의 한 소녀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되었다. 사진에서 킴푹의 앞에 오빠가 울면서 달려나오고 있다. 6남매 가운데 3살, 9개월된 동생들과 2명의 사촌이 사망했다.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사진은, 전 세계로 전송되어,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그대로 전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Phan Ti Kim Phuc,1963~ )이었고, 당시 나이 9세였다. 얼굴을 제외한 전신 65%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당시 그녀의 두 사촌은 목숨을 잃었고 9살이던 킴 푹은 옷에 불이 붙자 이를 벗어던지고 울부짖으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네이팜 탄에 등과 목덜미, 왼팔을 부상당한 소녀는, 우트 기자의 도움으로 남베트남 코레이 병원으로 후송되어, 17번에 걸친 피부이식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당국은 소녀가 공포에 질려 걸었던 고난의 길을 '식민지 보유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운 영웅적 행위로 추켜 세우며, 이 소녀를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킴 푹은 1994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했고, 기독교로 귀의하여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신한 그녀는 1999년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네이팜 탄의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킴 푹 양의 사진을 찍은, 당시 AP 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Nick Ut)는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1973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쿠바에서 만나 결혼하고 함께 캐나다로 망명한 남편 토안(Huy Toan)과 함께

Phan This Kim Phuc, right, and her husband Toan have returned to Newfoundland

15 years after they defected to Canada at the Gander airport. — Star Photo by Michael Rigler

"..나는 모두 열일곱번의 수술을 받았다. 1984년 독일에서 마지막 수술을 맏은 후에야 목과 어깨를 움직일 수 있었다. 2년 뒤 나는 대학에 진학하며 쿠바의 하바나로 갔다. 거기서 나는 같은 베트남 학생인 토안을 만났고, 그는 내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내게 수영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에 덴 살갗 때문에 나는 햇빛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 결혼에 이른 사랑,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미소 짓는다. 어렸을 때 훙터 때문에 어떤 남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 기억하는가? 그 생각은 틀렸었다. 토안과 나는 사랑에 빠졌다.
1992년 9월, 친구들은 하바나에서 아름다운 결혼식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을 향한 여행은 1994년 캐나다로 도망치듯 떠나오면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간직해둔 이야기가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였고 자유가 있었지,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걸 가진 셈이었단다'...."

나를 전쟁의 상징으로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 때부터 ‘행복’과 ‘사랑’이 보였습니다. 이미 내게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지만, 그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고통을 나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내게 주어진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비록 쓰라린 상처는 입었지만 무언가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지난 세월 동안 강해진다는 것, 희망, 진정한 용서 그리고 감사함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예, 저 역시 ‘왜 하필 내가?’ 한 적이 많았습니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저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지요. 제가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화가 제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잡아 제 삶을 파괴하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했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베트남 정부에 의해 자신의 꿈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까지 관두고, 내외신 언론의 인터뷰 대상이 되어야 했고, 몸에 남은 흉터 때문에 사랑과 결혼을 꿈꾸지 않았던 여자로서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쿠바에서 약학을 공부한 킴 푹은 러시아에서 신혼여행을 보낸 뒤 경유지인 캐나다에 들렀다가 망명을 신청해 현재는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킴 푹은 평화운동가, 유엔친선대사, 아동복지 운동가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전 세계를 돌며 화상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강연을 하고 있다. 킴푹은 아들의 이름을 후안이라고 지었다. 이것은 베트남어로 앞날의 희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야 죽을 뻔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던 의사를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감동적인 순간도 맞이한다.

1996년 33세가 된 소녀 킴 푹과 49세가 된 폭격의 주인공 존 플러머(John Plummer)의 극적인 만남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존 플리머(John Plummer 1947~)는 이 사진 때문에 고통과 번민 속에서 지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당시 네이팜탄을 폭격한 조종사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았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 소녀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당시 수교가 되지 않아 입국도 불가능했고, 입국을 한다하더라도 어디에 가서 찾을는지도 몰랐습니다.

고통하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당시 그 마을에 민간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작전본부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너의 책임은 아니라고 위로하였지만 존 플리머의 마음엔 여전히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결혼생활도 파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두번째 부인의 인도로 그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버지니아주 푸르셀빌(Purcellville)의 베다니 감리교 연합교회(Bethany United Methodist Church) 목회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마지막 월요일 미국의 현충일인 Memorial Day, 재향군인의 날, 존 플러머(John Plummer)

는 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식에서 바로 그 사진의 주인공인 킴푹을 만나게 됩니다.

킴푹은 평화의 화환을 바치기 위해 그 자리에 왔고, 존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기념연설에서 킴푹은 이제 자신은 비록 아직도 화상의 통증은 계속되지만, 자신은 그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진엔 보이지 않지만, 제 모습의 뒤에는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 완전히 넘어진 시체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킴푹은, 이제는 마을을 폭격한 사람들을 용서한다며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함께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을 호소하며 연설을 마쳤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속에서 존 플러머는 자기도 모르게 군중을 헤치며 단상 쪽으로 나왔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오던 킴과 극적으로 상면을 하게 됩니다. 존은 자신이 바로 24년 전 그녀의 마을을 폭격한 조종사라고 밝혔고, 두 사람은 약 2분 정도의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가집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계속해서 "I'm sorry. I'm truly sorry." 하고 말하자 킴푹은 팔을 벌려 그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이미 용서했어요." 그날 저녁 이 두 사람은 호텔에서 다시 만났고, 존은 용서를 재확인하고 두 사람은 식탁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후 존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2분 동안의 짧은 대화가 지난 24년 동안의 악몽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용서는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선물이었습니다. 그저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지금 존 플러머 씨는 감리교 목사로 교회를 섬기며 십자가의 용서를 선포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은 말했다. 나는 마음 속에 증오를 품어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없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내가 당한 일이 대체 누구의 잘못이냐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진심이다. 나는 용서했다.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 똑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몇년 전 나는 워싱턴DC에 있는 베트남 전 퇴역 군인 기념관을 방문했다. 나는 수많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보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는 물었다. 왜 그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나? 나는 많은 퇴역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존 플러머라는 이름의 그 퇴역 군인은 내가 화상을 입던 날 우리 마을인 트랑방 공격 계획에 참여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용서를 구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도 나와 같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헬리콥터 기관총 사수였던 마이크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말하는 내내 그는 울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 사진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직접 만나고 당신이 저를 용서해 주시다니요. 꿈만 같은 날입니다. "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런 특별한 순간을 많이 경험한다. 무두가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1999년 사진작가 닉 우트와 한국을 방문했을 때

2009년, 30여년 전 그 당시 킴 푹 (Kim Phuc)을 촬영했던 닉 우트(Nick Ut) 기자와 워싱턴에서 만나.... 6 March 2009

... 사진작가는 내 생명을 구했다. 닉 웃은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진을 찍자마자 카메라를 내려놓더니 나를 안고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 '사랑'하면 뭐가 떠오르지?' 친구가 내게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내 삶을 바꿔주신 하나님의 사랑, 가족의 사랑, 나를 치료해 준 의사들의 사랑, 자유와 용서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아이들의 너무나 아름답고 강인하고 기쁨이 넘치는 사랑, 넓은 바다의 사랑, 내 아픈 살갗을 진정시켜준 서늘한 날씨의 사랑, 사과의 사랑, 웃음의 사랑, 기도의 사랑, 핑크빛 사랑, 어디에서든 서로를, 특히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젊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사랑, 진지한 것들에 대한 사랑, 장난스러운 것들에 대한 사랑...."

" 그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사진을 가지고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캐나다에서 살 게 된 뒤로 오랫동안 나는 그 사진을 잊고 싶었다. 그 사진은 어디든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새로운 나라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용한 삶을 누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영국 기자들이 꿑내 나를 찾아냈다.
그 무렵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낸시 코폭이라는 소중한 친구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던 낸시는 퀘이커 교도이자 평화 운동가였으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분은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끼쳤다. 여든 다섯의 나이에도 낸시는 사람들을 돕고 망명자와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자기 집을 내어주는 등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그분은 내가 그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사진을 가지고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결국 나는 그 사진을 내 삶에 허락된 놀라운 선물로 받아들였다. 내 삶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로 말이다...."

과연 킴 푹의 용서는 용서인가?

용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모든 전쟁들을 묵인해주는 것인가?

과연 무엇을 용서하는 것인가?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인가?

수많은 토론들과 질문들을 받은 킴 푹의 신앙 간증 고백-용서..

킴 푹은 용서할 기회라도 가졌지만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죽음들.....

그러나 그녀의 삶에 최선을 다한 그녀의 결단을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전쟁 고아들을 위한 활동을 기억하며...

☞ 킴 푹의 사이트 www.kimfound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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