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CH1=의심, AG=도마)

난 이런 확실한 사람이 좋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그냥 믿는 척하는 사람을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기에 다들 정말 믿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믿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영적기만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스스로도 속고 있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믿고 싶은 그 마음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감정에 속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 자체가 사랑은 아닙니다. 그 사랑이 표현될 때 비로소 사랑이 됩니다.
종은 울리기 전까지 종이 아니듯이 사랑도 사랑의 행동을 하기 전까지 사랑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기도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도마는 열 한 명의 제자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의심을 억누르고 믿는 척하기가 쉽습니다.
자기만 안 믿으면 이상한 놈이 되기까요.
그리고 속으로는 늘 의심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도마는 못 믿겠다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린 믿음은 언젠가 빵꾸똥꾸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무력한 신앙의 원인이며 한국에 크리스챤이 20%가 넘는다고 하면서도
그 열매와 증거가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하나 따져가며 믿음의 초석을 닦아야 하는데 그냥 믿어버립니다.
믿음의 초석을 닦는 것이 번거롭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집니다.
신천지 이단에 넘어가는 성도들이 평신도보다 중직자가 더 많습니다.
놀라리 일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단의 극성을 통해 한국교회에 믿음의 초석을 닦으라는
메세지를 주시고 계십니다.
장로요 권사임에도 기독교의 견고한 초석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말씀처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 한 명 중에 한 명이라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도마처럼 보고 체감할 때 믿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의심많은 도마라고 비난하지만 도마만 같아도 복입니다.
도마만 같아도 이삼십 년 교회를 다니고 이단에게 넘어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한국교회의 문제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그런 도마를 위해 주님은 확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도마가 의심한다고 주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제자들 역시 의심하면서도 떳떳하게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심을 해결해 주시는 자상하고 확실한 하나님입니다.
자꾸 따지는 사람이 결국 큰 믿음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방해물이 아니라 꼭 건너야 할 외다리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면서 하나하나 믿음의 발을 떼는 사람이 결국 깊은 불신의 강을
무사히 건너갑니다.
기독교는 탄탄한 이성의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의심은 그 이성을 일깨우는 첫발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와의 만남을 위해서는 이성이라는 중매쟁이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성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성은 확실한 믿음의 중매쟁이입니다.

GP는 체감하는 신앙으로 무장합니다. GP는 분위기에 휩쓸려 믿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방 드러납니다. 그리고 다 속여도 자신은 속이지 못하니까요.

목사는 따지지 않고 쉽게 믿는 성도를 좋아합니다. 피곤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목사의 한계가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은 목사를 공부시키는 천사를 보내주십니다. 따지는 성도, 의심하면서 확실히
믿고 싶어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목사를 위해 보낸 천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마귀가 좋아하는 바보들의 천국이 될테니까요.

그러나 목사만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도 그런 성도를 엄청 좋아합니다.
마귀는 믿는 성도가 많아지고 교회가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충 믿는 척하는 성도가 수 천만 명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확실한 믿음의 초석위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가장 무서워합니다.

대충 믿고, 어설프게 믿고, 분위기에 휩쓸려 믿는 사람은 마귀의 쌍둥이입니다.
나는 도마의 쌍둥이가 되고 싶습니다.
도마의 별명이 디두모인데 그 뜻이 "쌍둥이"라고 합니다.

번거롭더라도 하나하나 따져가며 굳건한 믿음을 갖는 주님의 사랑받는 GP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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