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수용소에 수감 중인 오길남 박사의 가족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내 신숙자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북한요원의 말을 믿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다. 일년 후에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한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탈출한다. 그리고 혜원 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만11세, 규원 9세였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씨는 탈출을 성공하면 석달 안에 빼내 달라.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며,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달라. 나는 얘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 도망치라!"고 말했다.
신숙자_1942년 12월 10일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통영여중 9회 졸업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께 드리는 호소문(요약)
통영의 딸을 구해 주세요!
존경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께!
저희는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을 하고있는 시민입니다. 신숙자씨는 독일 유학생이었던 오길남씨의 아내였습니다. 오길남씨는 독일 교포 윤이상(음악가), 송두율(교수), 김종한(청과 유통 사업가)의 꼬임에 빠져 가족 전체를 데리고 1985년에 월북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신씨는 남편 오씨에게 "월북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다"며 맹렬히 반대했지만 남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그 이듬해인 1986년에 신숙자 모녀를 인질로 잡아둔 채 오씨만 유럽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북한 정권이 오씨에게 부여한 임무는 독일 유학생을 포섭해서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씨가 이 사정을 신숙자씨에게 말하자 신숙자씨는 남편 오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가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주세요. 우리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지언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런 범죄자의 딸이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유럽에 도착한 오길남은 북한 공작원을 뿌리치고 탈출했지만 6년 동안 숨어살면서 윤이상, 송두율, 김종한 등에게 아내와 두 딸을 유럽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윤이상은 신숙자 모녀의 사진과 육성 녹음테이프롤 주며 다시 북한으로 가라고 협박했으며, 김종한은 "당신은 개XX다. 개XX의 XX들이 죽든 살든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극언을 퍼부었을 뿐입니다. 오씨는 199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으로 다시 귀순했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님!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꼬임에 빠진 어리석은 남편 때문에 20여년 동안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전전하고 있는 가련하지만 꿋꿋한 한 여인과 그 두 딸을 구해주십시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여인은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고 9살, 11살이었던 두 딸은 이제 30대 중후반의 아주머니가 되었습니다. 반기문 총장님! 대한의 딸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전전하며 짐승처럼 학대받고 있는 비극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
'통영의 딸' 구출을 기원하는 대한민국 시민들이 애절히 간청드립니다.
아픈 현실입니다...20년안에 북한땅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