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성숙자반 강의를 듣었습니다. 책으로 이미 읽은 내용임에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회개

 

 

회개와 자복

 

'자복하다'는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 입니다.

이 단어의 첫째 뜻은 '고백하다' 둘째 뜻은 '동의하다'입니다. 셋째 뜻은 '약속하다'입니다. "

세 가지의 공통점은, 고백이든 동의든 약속이든 모두 다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회개하다'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인데, 아예 돌아서거나 길을 바꾼다,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리다 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자복이 회개의 시작일 수는 있 지만, 그 자체가 회개인 것은 아닙니다.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전제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얻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를 제일 먼저 말씀하셨고, 세례요한도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회개가 중요하다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중요합니다.

또 회개 없는 삶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위해 회개가 필요합니다.

 

세례요한의 회개 촉구

 

세례요한은 자복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촉구했습니다.

부자들에게는 여유분을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이 회개의 삶이라고 했고,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으며, 이것은 타인의 재산을 부당하게 탈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의 재산을 좌지우지하던 사람의 회개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남의 재산을 더 이상 부당하게 탈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인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더 이상 자신의 사익을 채우지 않을 것에 대한 분명한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자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삶과 행동이 수반되는 회개의 열매를 촉구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구구절절 옳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과연 회개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옳은 말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바른 말로 질책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사람들은 단지 자복했을 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야단치고 명령하는 것으로는 상대의 동의나 고백, 약속까지는 받아낼 수 있지만, 그 자복을 통해 회개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질책과 명령만으로는 인간의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이끄신 회개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아리마대 출신의 갑부 요셉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에 최고급 세마포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모셨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고가품인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백근이나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렸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치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위해 자신의 새 무덤과, 값비싼 향품을 아낌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이나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국사범으로 사형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전의 두 사람이라면 국사범으로 사형당한 예수님을 외면해 버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인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세상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죽기도 전에 무덤이나 만들다니 무슨 짓이냐?“고 야단 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과 니고데모는 자기 여분의 것을 자발적으로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부활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았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동시에 부자였습니다. 성경이 세리장인 그 가 부자임을 강조했다는 것은 그가 부정축재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었던 세리들을 경멸했으므로,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경멸당하는 만큼 돈에 더 집착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삭개오는 자신의 열등한 외모로 인해 다른 세리보다 돈에 더 집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 세리가 왜 이렇게 잘 사느냐? 너는 양심도 없느냐? ” 질책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탈취한 재산은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세리 역시 예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회개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사형집행 책임자 였던 백부장의 경우 운명하시는 것을 보면서 “ 이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정보부장의 사형을 집해한 총책임자가 그 현장에서, “ 김재규씨는 민주 열사다” 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백부장의 선포는 예수님의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그 공개적인 비판으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군인들을 향해 “너희들 왜 그렇게 포악하냐, 강포하지 마라, 무소하지 마라” 꾸짖지 않으셧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처럼 회개를 명령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거나 질책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서 부자도,세리도,군인도,강도도, 전부 자발적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자발적인 회개를 이끌어낸 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아닌 척 하는 요셉과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비난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셨고, 똑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유한다는 이유로 뭇사람들의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삭개오를 위해 기꺼이 그 비방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신비스런 사랑의 체험은 생전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만났을때 자발적으로 회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복은 잘 하면서도, 그 자복이 회개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주님으 사랑에 대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라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날마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 중심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회개의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1. 회개는 우리의 행위 이전에 우리의 중심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2. 회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어 있음입니다.

3. 다른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나의 삶입니다.

 

    회개에 대해 생각만 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회개하라고 소리치는 것은 율법입니다.

    복음은 회개의 동인인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나의 삶입니다.

 

 

 

   - 성숙자 반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