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지 말고, 불을 붙이라.”(전병욱 목사) 

 

 


교육이란 무엇인가?

‘통에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는 것이다.’ 시인 예이츠의 말이다.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마치 커다란 깡통에 잡동사니를 채워넣는 것과 같은 일이다.

검색만 하면 나오는 내용 채우기에 분주한 것을 공부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향력의 핵심에는 ‘정체성’과 ‘소통’이 있다.

요즘 지나치게 소통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 정체성없는 소통은 무의미하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가슴의 불이다.

내적인 확신이다. 

 

대학 때 버스를 탔다.

어떤 아저씨가 무좀 낫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무좀약 장사치인 줄 알았다.

무슨 약초에 무슨 기름을 넣고 끓이면 된다는 민간요법이었다.

다 설명하고는 부디 무좀에서 낫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이 아저씨는 ‘무좀의 불’이 붙은 사람이었다.

자기의 방법대로만 하면 무좀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확신이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어떤 목사님은 ‘검은 깨 불’이 붙었다.

검은 깨만 먹고, 머리에 바르면 머리카락이 난다는 확신이있었다.

사진 첩까지 들고 다니면서,

이전의 대머리와 이후의 무성한 머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게 불이다. 이게 확신이다. 

 

 

왜 사역이 힘든가? 불이 없기 때문이다.

불없이 하는 사역은 피곤하고, 고단한 일이다. 불이 있으면 일이 쉽다.

그리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다.

지난 주에 미얀마에 구제 사역을 갔었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낡은 트럭 4대에 나눠 타고 3시간 넘게 달렸다.

먼지와 충격으로 지치고 힘든 여정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내려보니 어떤 차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피곤함이 없었다.

왜? 어떤 오빠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머있고, 인기있는

오빠 하나가 타니 험한 여행이 전혀 힘들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어떤 차는 우울과 낙담이 있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표정으로 내렸다.

왜? 폭탄 오빠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을 아는가? 

 

 

나는 설교를 불붙이는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내용을 집어넣는 성경공부가 아니다.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불붙은 사람이 변화되고, 불붙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불은 불을 낳는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데이빗 뱅크스는 “천재 과잉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재들은 시간과 장소에 균일하게 흩어져 있지 않다.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몰려 있다.’ 오성과 한음은 한 마을에 살았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교제하며 자랐다.

샤르트르와 시몬드 보바르가 같은 집에 살았다.

인구 7만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왜? 불이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난 달 경북 영양의 일월산에서 어떤 등산객이 산삼 48뿌리를 캤다.

산삼은 이곳에서 한 뿌리, 저곳에서 한뿌리 나는 것이 아니다.

산삼은 몰려서 난다. 인물이 있는 곳에서 인물이 난다.

인물이 나오는 시간에 인물이 몰려서 난다.

불붙는 원리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스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이 필요하다.

견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확신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는 불의 사람이 나와야 한다.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같은 그 사람이 나와야 한다.

영향력이 없은 사람은 스스로 물어보라.

 

 

‘내 가슴에 불이 있는가?’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