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입 맞추게 하신 주님
집회의 주인은 주님이며 주님의 집회여야 한다는 것을 내 귀와 눈을 열어 준 것도 참 주님의 은혜였다. 노 형제님은 외국인인 내가 이 집회에 처음 왔는데 집회소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줄 것이 없으시다 하셨다.
그러면서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고 하시며 아가서 1장을 열어 주셨다. 난 이 선물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모른다. 세상에 와서 가장 큰 선물이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꿀 같은 선물이었다. 주님과 입 맞추게 해 주셨다. 기억이 생생하다.
“형제님 이것은 지혜자(솔로몬)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지혜자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형제님이 주 이름 안으로 들어오신 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더욱 전진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진하여 주님 안으로 더욱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꿀 같은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라며 아가서 1장을 읽어 주셨다.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형제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워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주님은 우리와 입 맞추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껴안으시고 서로 눈을 맞추며 달콤한 밀어를 나누며 입 맞추시기를 원하십니다. 입맞춤은 두 사람만이 서로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그런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사랑은 세상의 어떤 즐거움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포도주)로서 얻은 구원의 즐거움보다 더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들이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서 더 전진하여 당신과의 깊은 교통가운데 들어가서 입맞춤과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지 깜짝 놀랐다. 이러한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구원받고 나서 난 나의 즐거움은 생각했어도 주님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난 처음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것이며 달콤한 것인가 상상해 보았다.
사실 그간 나는 우리를 멸망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했을 따름이다. 날마다는 아니었다. 생각날 때 한번씩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 영혼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으로 끝났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그분의 아름다운 사랑을 느끼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주님과 서로 눈을 맞추며 입맞춤을 나누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주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포도주를 누리는 생활(간증)에 만족했다. 입만 열면 구원간증이었다. 주님이 주신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품에 안고 주님과의 깊은 대화와 교제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 또한 주님과의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심은 더 없이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매일 이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 분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분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와 몸을 함께 나누는 아름답고 깊은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신다. 지금은 형편없는 거친 망아지와 같을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솔로몬 왕궁의 무엇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오래 전부터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할 때 주님이 내게 부어주신 기름(성령, 구원)이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름 같은 것인가 주님의 이름이 온 방에 가득 찬 아름다운 향기 같은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이 어떤 이름보다 더 향기로운 나를 적시는 기쁨인 것이다. 나를 구원해 주신 그분의 이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이름이 어디에 있을까.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이런 주님은 나와 한 몸이 되시고자 합니다. 나를 주님의 침궁으로 부르시고 맞이하십니다. 침궁은 오직 주님만이 머무시는 침상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왕궁의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침상으로 인도하여 깊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와 주님은 이미 한 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어둠, 밤)과 고통에 빠지면 주님은 우리를 더욱 깊은 침상(주님과의 교통의 장소)으로 이끄시고 주님의 모든 비밀과 계획을 보이시며 주님의 더 깊고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사랑은 피의 능력(포도주)을 말하는 생활로부터 더 전진함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설혹 우리가 다듬어지지 않고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솔로몬 왕궁의 휘장과 비길 데 없이 아름답게 단장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거칠고 형편없는 우리를 보석과 같이 아름답고 견고하게 단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제 밤에 보았던 그런 달콤한 주님을 찾아도 계시지 않습니다. 찾아도 찾아도 만나지 못하던 주님이 어느 날 태양 빛에 그을린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것은 내 모습입니다.
세상일에 바빠 햇볕에 검게 그을린 형편없는 내 모습입니다. 나는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틀어진 내 마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간 어미(교회)의 아들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아 널 지키지 못했구나 라며 미안해하시는 주님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을 본다. 그간 우리는 피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입만 열면 피의 구속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거기서 멈추어 섰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주님은 여기에 멈추어 설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과의 더욱 은밀한 사랑에 빠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과의 누림이며 교통이다.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 형제님께서 한 눈에 나의 어떠함을 보셨던 것이다. 구원받은 지 25년이 지난 사람의 간증이 그러함을 듣고 내가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되며 더욱 전진할 것을 권면하기 위하여 말씀을 꺼내었던 것이다. “집회소가 가난하여 줄 것은 없고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며 이 말씀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것은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거지에게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는 말씀이었다. 나는 거지였다. 얻어먹지 못한 배고픈 거지였다. 구속의 은과 하나님의 생명을말하는 금은 있으나 먹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여 걷지 못하는 나를 꾸짓는 것이었다.
나는 구원만 받았을 뿐 25년을 항상 제자리걸음만 한 앉은뱅이였다. 일요일 교회마당을 밟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였다. 내가 곧 성전 앞에서 평생을 구걸하며 살아온 앉은뱅이 거지였다. 이제 걸으라는 것이다. 더 이상 앉은뱅이 노릇을 해서는 않되지 않겠느냐는 권면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부르신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주님의 마음에 두고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리들을 주님의 양떼인줄 모르고 내 양떼라고 생각하면서도 먹이지도 못하고 뜨거운 한 낮에 쉬지도 못하게 한 것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목동들인가를 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라지 못하여 앉은뱅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리들을 어떻게 양육하는지 알지 못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과거 주님의 양떼들을 어떻게 먹였는지 발자취를 더듬어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편없는 염소새끼일지라도 주님께서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장막 곁에서) 보살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칠고 보잘것없는 바로의 조랑말들이지만 어느 날인가 우리는 왕과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일등 말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주님은 우리 눈이 오직 한곳, 주님만을 향하여 응시하는 비둘기 같은 눈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당신 하나만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하나만을 사랑하는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전진해야 합니다. 이 형제님이 구원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 우리의 삶은 여기서 보다 전진하여 주님과의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지적해 주셨다. 비둘기 눈이 먹이만을 오직 응시하는 눈으로 고정되었듯이 우리의 눈 또한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꿀같이 달며 내 가슴의 몰약 향낭 같은지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구원받고 난 이후, 교통 가운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즐거움인가를 알려주셨다.
집회가운데 응답하시는 주님
중국 교회에서의 집회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두 세 명만 모이면 기도와 찬송이 있다. 모이는 대로 찬양과 찬송시가 이어진다. 단 세명만 모여도 기도한다.
집회소에 나오는 사람이 세 사람이 되면 기도와 찬송이 시작된다. 시간낭비가 없다. 우리처럼 인도자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사람이 많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는 대로 찬송하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다.
우리가 얼마나 악하며 멸망 받을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회개가 있다. 오직 주님 만이시며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라는 찬송시들이 있다. 그리고 깊은 기도들로 연결된다. 잘은 모르지만 어느 때는 옷깃까지 눈물에 젖는 기도들이 있다. 짧지만 주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들이 형제들의 입을 통하여 간단없이 토해진다.
그러나 집회를 마칠 때의 기도는 모두 찬송과 찬양으로 마친다. 주님께서 응답하셨으며 주신 것으로 감사한다는 기도가 있다. 나는 궁금했다. 손에 맞는 한 형제님께 집회가운데에서 무슨 기도를 했으며 주께서 어떻게 응답하셨기에 감사하는지 물었다.
“형제님 주님께 무엇을 구했는데 응답을 주셨다고 하시나요?”
“예. 주님께서는 매번 저희가 구할 때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집회는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집회입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외식과 거짓 말로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응답이 없는데도 자기의 권위를 내 세우려고 응답을 받았다고 말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내 25년 신앙생활 가운데 주님의 응답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기도 했다.
“형제님. 주님께서는 매번 구할 때마다 정말 100% 응답하십니까 아니면 90%정도?”
“형제님이 보셨는데 믿지 않으시는군요. 형제님이 집회에 나오시는 동안 주님께서는 한번도 응답하지 않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 형제님은 주님께 구하는 일에 얼마나 응답을 받으십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난 내 간구에 주님은 10%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솔직히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해 본 일도 없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기도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중국 교회 안에서 주님은 100% 응답하신다 하니 믿기지 않았다. 집회에서 자세히 들어볼 것이라는 생각만두고 말을 맺었다.
중국 교회의 집회방법은 두 가지이다. 주일 대 집회와 평일에 행해지는 일반집회가 있다. 평일의 일반집회는 주로 기록된 말씀(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강론과 간증, 증거의 말씀들을 토해내는 형태로 열린다. 거의 매일 일과가 끝나면 집회소로 모여든다. 신앙생활 자체가 교회생활이라고 할만큼 집회소에서 말씀과 더불어 산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강론집회는 깊고도 심오하다. 가끔 예를 들어 다니엘서 강론이 있다고 하면 지역안에서 다니엘서에 맑으신 형제님을 모시고 몇 시간동안 아주 진지하고도 열띤 강론과 교통이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어느 한번 변론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처럼 나와 다른 생각이나 의견은 처음부터 틀렸다고 하거나 트집을 잡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가 어떤 말을 하건 자기 말만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이 틀렸다거나 성경에 어긋난다거나 하지 않는다. 단지 강론이 끝나면 "제가 보충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부족한 부분이나 미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보충하며 도와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야기하는 순서가 있다. 고린도 전서 14장의 가르침에 따라 방언을 하거나 예언의 말, 계시의 말이나 가르치는 말을 할 때는 차서(次序)에 따라 아랫 사람부터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위사람부터 말하는 것이 보통이나 교회 안에서는 종이나 아랫 사람, 어린 자부터 말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느낌이다. 어린 자가 가장 큰 자이기 때문이다. 앞서 가시는 분이 먼저 입을 열면 다른 사람이 말할 것이 없다. 어린 자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충분히 말하게 한 다음 앞서가는 사람들이 서서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가는 방식으로 말을 이어간다.
주일 대 집회는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말씀이라도 주님의 깊은 마음을 만지는 집회이다. 성경을 강론하는 집회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을 실제 속에서 찾아 발견해가는 집회이다. 대체로 시작기도에서 나오는 것들을 말씀과 게시, 기도, 찬송의 방법으로 해경해 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가정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대집회에 나온다.
중국의 신앙생활은 기록된 말씀을 누리는 생활(성경말씀)과 주님의 마음을 만지는 생활(기도)로 구분된다. 기록된 말씀 이외의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만지고 그리고 주께 구하는 것들은 기도로서 주님께 나아간다. 말씀을 중요시 하는만큼 기도 또한 중요시 한다.
말씀을 상고하는 생활과 기도하는 생활이 균형을 유지한다. 주일 대 집회의 기도는 주께 간구하는 내용이 많다. 생활가운데 필요한 주님의 공급을 기도로 간구한다. 시작 기도가 그 날 집회에서 행해질 제목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주님의 공급이 필요한 사람들이 입을 열어 기도에 들어간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느끼기에 공급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미사여구의 입에 붙은 기도는 없다.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생활용어로 주께 기도한다. 그리고 나면 여러 사람이 일어서 선포된 내용으로 주님을 진열하고 열람한다. 어떤 이는 성경 말씀으로, 어떤 이는 생활 가운데의 간증으로, 어떤 이는 찬송으로, 시로, 어떤 이는 계시로 주님의 응답을 토해낸다.
마지막으로 몇 형제님들이 일어서 토해 내어진 말씀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그려 낸 주님은 절묘하게도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중국 교회생활에서 이것만큼 놀라운 일은 없었다. 이스라엘이 간구할 때 주께서 우림과 둠빔이 있는 12개 보석가운데 있는 히브리글자를 통하여 빛으로 나타내신 말씀들을 제사장이 해석하는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보석가운데 빛으로 나타내신 것이 주님의 응답이셨다. 보석과 같은 형제들의 입을 통하여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계셨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것을 해석하였듯이 제사장 같은 형제들이 나타낸 말씀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소 안에서 응답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시다니요. 나는 입을 벌린 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출 28:30)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아뢰었다. "오늘 소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만약 그 허물이 저나 제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은 풀려 났다.(공동번역 삼상 14:41)
주님이 임재하신 집회가운데, 성소 안에서 우림과 둠빔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시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집회는 응답하는 집회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응답하는 집회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있었다
주님이 내 모든 마음을 읽으실 것이라는 경건이 머리털을 뻣뻣하게 추겨 세웠다. 주님이 계셨다. 이 날처럼 주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껴 본 일은 없다.
뒤이어 주님의 응답에 대한 찬양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집회를 마치는 기도는 당연히 주님의 응답하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가, 감사함으로 눈물로 이어지는 모습이 이해되었다. 주님의 집회가운데에는 100% 주님의 응답이 있으셨다. 주님이 응답하시라고 소리를 지를 필요도 없었다.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함도 아니요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함도 아니다 라는 말씀이 이해되었다. 우리는 그간 단지 합당한 예배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합당한 예배가 없었기에 합당한 기도와 주님의 응답이 없으셨던 것이다. 주님의 자녀들의 집회가운데에는 주님이 응답하고 계셨다. 참으로 비밀이었다.
예배방법을 보여주신 주님
중국에 들어와 합당한 예배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도 진실로 주님의 큰 은혜요 긍휼이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주께서 즐거워하시는 합당한 예배인가를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외식하는 자였다. 구약의 여러 기록에 주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이 있다.
맹한 사람은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주님께서는 철저하리 만치 자세하게 섬기는 규례와 율례에 대하여 우리에게 일러 주셨다. 그런 주님이셨다. 레위기의 가르침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께 여쭙지 않았다. 한 마디로 우리들 마음대로 했다. 내가 한국에서 25년간 교회생활을 한 그 교회도 판에 박은 듯이 찬송과 기도, 말씀으로 가르침, 마치는 기도와 찬송이 전부였다. 주님의 임재가 없었다. 지루했다.
그 교회는 그래도 낫다고 한다. 보통 교회라는 곳에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찬송과 기도, 말씀이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열된다고 한다. 매주 프린트된 프로그램에 따라 예배가 진행된다. 주님이 사람이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는, 하나님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고 계셨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곳이다. 주님이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시는 교회, 주님은 저만치 서서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실 그런 예배를 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곧 이때라 하신 그 날은 언제인지 모르겠다. 아들의 영이 주인이 되는 그런 예배가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유전처럼 내려왔을 것이다. 어떤 예배가 주님이 즐겨 받으시는 예배인지 생각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예배라기보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배방식이다. 고봉의 메시지가 있다는 교회 안의 예배방식에도 일정한 형식은 있지만 사람들이 자기 지식을 말하고 있었다.
책에서 본 주님의 그림자를 읽고 있었다. 주님이 두렵지 않은 곳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본 일이 없으니 담대할 것이다. 주님이 주인 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은 아니었다.
어느 날 난 매번 반복되는 집회가 아무런 근거 없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이 즐겨 받으시는 예배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궁금함이 가득 찾을 때 노 형제님께 물었다.
“형제님. 매번 하는 집회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집회의 순서나 형식이 아무런 근거 없이 진행된다고 보지 않는데 어떤 근거에 의해 하는지 궁금합니다”
참 대답은 간단했다. “주님께 물어보세요” 이었다. 못마땅한 내 표정에 미안하셨든지 형제님은 다시 입을 열어 대답하셨다.
“주님이 하시라는 대로 우리는 따를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입을 여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 ”
“형제님. 요한복음을 보세요. 주님께서 자세히 일러주실 것입니다”
가 전부였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긍휼가운데 나의 작은 눈을 크게 열어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13장에 주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그 전에 주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먹이시는 내용이 있다. 주님의 집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풍성한 음식으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먹이신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였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주와 선생이 되어 어떻게 함이 온당한 것인지 본을 보여 가르친 것이라 하셨다.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는 권고의 말씀이요 명령이 있다. 집회에는 내용이 있다. 주님의 집회가운데는 서로 발을 씻기는 일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포용하는 화해가 있다. 남의 발을 씻기 이전에 먼저 내발을 내 미는 실행이 먼저이다. 내 발을 먼저 내 밀었을 때 씻김을 받을 수 있다. 집회가운데에는 회개와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랬을 때 예수를 팔기로 작정한 유다(아닌 것)가 드러나며(요 13:26-27), 베드로의 교만(요13:36-38)이 드러나는 것이다.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올 때 어두움이 물러나며 동시에 고침을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주님의 능력이 집회에서 나타나야 한다.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성소로 들어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어떠함을 모두 번제단에 올리고 주님이신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개하며 태우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때 주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계셨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시지 않았고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가 있는 집에 주님과 함께 하는 작은 무리들과 함께 하셨다. 요한복음 12장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계시는 주님은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이 계신 성전이다.
그곳에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마르다가 있었고 주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마리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예루살렘의 큰 성전에서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주님을 죽이기로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 주님은 평강의 집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계셨다.
옥합을 깨트려 나온 향유를 머리털에 발라 주님의 발을 씻는 주님의 죽으심을 표현하는 마리아가 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주님과 함께 앉아 떡을 떼고 있다. 곧 부활생명이 나타나고 있다. 부활생명이 무엇인가.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죽음이 먼저이다. 죽은 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오직 주님의 생명만이 나타나는 집회이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요 12:9)
우리의 집회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있고 하나님의 먹이심이 있다. 우리의 회개와 함께 서로간의 화해와 용서가 있어야 하며 한편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봉사와 찬양이 있어야 하고, 종국적으로는 주님의 부활생명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그 날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 집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집회는 죽은 집회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에 계시지 않았다. 좁지만 용서와 회개, 봉사와 찬양, 부활생명이 나타나는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계셨다.
프로그램과 순서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주님의 집은 우리가 쉼을 얻는 곳이며 안식하는 곳이다. 우리는 단지 앉아서 주님이 주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님이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행사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운행하시며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셔서 씻으시고 죽은 것을 다시 살리시는 일을 계속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집회였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한다. 집회 안에는 씻는 물이 있다. 더러움과 부끄러운 것들을 서로 씻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생활화되어 있다.
교회의 행정을 보여주신 주님
내 눈과 귀에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1-2년의 작은 기간이지만 교회 안에 수군거림을 보지 못하였다. 형제를 비방하고 무리를 짓는 사소한 일을 보지 못하였다. 아주 작은, 우리가 들었으면 웃었음직한 너무 시시한 이야기도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
우리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적은 부담도 형제들에게 사과하고 잘못을 비는 포도주가 있다. 어떠한 작은 어두움이라도 집회에 가지고 오지 않는다. 마음에 화를 품고 그날 밤을 넘기지 않는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즉시라는 말이 옳듯 곧 바로 형제와 사화하고 라는 말씀이 생활화되어 있다. 같은 말이 하루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천국이었다. 내가 결코 잊을 수 없고 다시 가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되는 것은 그러한 천국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뒤에서 비방하고 속으로 미워하면서도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척 양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이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품어주는 주님의 역사가 날마다 있는 그곳에 가고 싶은 것이다.
주일 집회를 몇 번이나 지났으면서 작은 것 하나도 회개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는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갈 곳이 없어서 나오는 교회가 아니다. 구원받았다고 하고 십수 년을 주를 섬겼다는 말이 부끄러운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이다.
중국 교회 안에도 어두움이 있다. 사람 사는 곳에 사람 냄새 안 나는 곳이 어디 있을까. 사람 사는 곳에는 아름답지 않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교회 안에 드러나는 아름답지 못한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싶었다. 성숙한 교회의 행정이 알고 싶었다. 중국교회의 행정은 엄정하였다.
우리는 그간 행정이라는 말을 잘못 오해하고 살았다. 행정이라는 말은 우리의 대표자를 뽑아 그로 하여금 법과 제도로 우리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행정이라고 알았다. 내가 한국교회에서 경험한 행정은 교회 사무국이라는 곳에서 나름대로 집행기구를 구성하여 필요한 일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곳이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은 그것이었다.
중국에서 들은 행정은 사람이 하는 행정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도록 일임하는 것이 행정이었다. 세상은 너무 사람이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사람이 완전히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교회행정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손이 있고 입이 있어 직접 처리하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이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는 얘기는 철저히 말씀만으로 하는 것을 말함이었다. 평상시는 사람이 입을 열어 자기 의견을 밝힌다. 그러나 교회행정을 처리하는 경우는 사람이 나타난 성경말씀을 읽을 뿐 자기 의견을 섞어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회행정은 주님의 위임을 받은 주임형제만이 담당할 수 있다. 교회행정이 곧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위임을 받지 않은 형제들은 어느 경우든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느 형제가 잘못(죄)을 했다고 하자(마태복음 18장). 죄를 범한 형제를 본 형제는 그 사람과만 그 일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여기서 범죄한 것을 보거든 이라는 성경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직접 본 것만을 말한다. 들었거나 추측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단계를 넘어서 교회에 얘기하여 라는 단계에 들어올 때부터가 교회행정에 속하는 일로 취급한다.
교회행정은 주님의 위임을 받은 주임형제들이 담당하신다. 그러나 주임형제들이 결코 사사로이 자기 의견을 말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다. 깊은 기도가운데 들어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그리고 입을 열어 주님의 부담대로 열리는 성경말씀을 찾아 같이 읽는다. 읽기를 수차례 하다보면 자연히 주님의 말씀이 주어진다고 한다. 합당한 말씀이 주장될 때까지 기도가 계속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분들의 기도가 같아진다는 것이다. 같아진 기도가 주님의 결정이다. 이것이 교회행정이다.
나는 이러한 주임 형제님들의 엄중한 행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전체 사람에게 공개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느 경우도 형제를 참소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형제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교통과 교제가 있을 뿐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교회는 복종과 순종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주님의 행정아래 있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였다. 대부분의 크고 작은 일들은 집회소에 들어가기 전에 권면과 회개와 화해, 용서가 있다. 그침 없는 교통 가운데 주님의 긍휼을 실천하는 모습이 있다.
집회소 밖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교회의 행정가운데로 가져온다. 주임 형제님들의 권면과 중보 기도가 있고 기도로 하나님께 넘어간다. 모든 것은 주께 간구하는 기도가운데 기도로 처결된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주임 형제님들의 엄한 질책과 교회행정의 집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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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우리의 자리를 낮추며 주님이 높아지는 예배
주님의 터치가 있고 성령님의 사랑이 계신 예배
주님과의 소통이 있는 예배
그런 예배가 참된예배 입니다.
중국에서 이런예배가 있다니 부럽고도 놀랍습니다.
우리의 형식적이고 사람이 주인된 한국교회의 예배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한국 교회의 예배를 일으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