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길지만 끝까지 읽어보세요^^~우와.....하실겁니다....살아숨쉬는 예배가 이런 예배가 아닐지..
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1)
중국교회의 첫 방문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에 익숙했던 탓인지 모르지만 같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어렵게 만난 중국인 형제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중국지하교회로 들어서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중국교회의 첫 방문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에 익숙했던 탓인지 모르지만 같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다녔고 보았던 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교회라고 생각했던 곳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에 들어 온 첫해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어렵게 만난 중국인 형제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하얼빈교외의 한 가정교회(聚會所, 일명 지하교회라고 부른다)로 들어서던 기억은 평생잊을 수 없다. 그곳은 내가 교회라고 생각해 왔던 관념들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늘 주님을 만났다고 소리를 질렀을 정도이다. 자그마한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한 노인이 흙으로 뒤범벅이 된 신발을 닦고있었다. 또 한편에는 물에 닦은 신발을 그늘에 말리고 있었다. 초라한 형색에 하얗게 센머리, 골이 깊게 패인 얼굴을 보면 80중반은 훨씬 넘었음 직하였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걸레를 빨아 신발에 묻은 흙과 먼지를 닦고 있었다. 밖에 흙이 소복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신발의 묻은 흙을 털어 내고 걸레로 닦는 것 같았다. 중국에는 포장 길이 많지 않다. 내가 살던 흑룡강성은 한번 비가 내리면 바지 가랑이며 신발이 말이 아니었다. 흙 입자가 미세하여 작은 비에도 팥죽을 쑨 것 같이 질퍽하여 신발 밑에 흙이 잔뜩 달라붙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이기도 했지만 그곳 입구로 들어가는 길은 유달리 심하였다. 신발을 닦고 있는 노인을 보는 순간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노인 양반이 무엇을 못하면 여기서 신발이나 닦으며 먹고사는 것일까? 자식들은 없을까? 안타깝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인을 보고 나는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당시의 나의 어떠함이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의 경험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세상지식이었다. 나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런 세상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발만 열심히 닦고 있었다. 집회소에서 나타난 주님
교회 안에는 60-70명이 넘을 듯한 사람들이 긴 탁자 4개를 사각형으로 맞붙여 놓은 것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마침 어느 젊은 여자 분 하나가 일어나 찬송가를 눈물 반 울음 반으로 부르고 있었다. 일, 이절 연속되는 찬송가를 눈물을 훔쳐가며 반복해 불렀다. 같이 부르는 형제들의 얼굴이나 이 분의 얼굴 모두에 무엇인지 모르는 기쁨과 즐거움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찬송가를 부르기에 이러나 싶었다. 안내하는 형제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은즉 그 자매가 오래 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가 풀어지면서 그간 의미도 모르고 불렀던 찬송가가 자기 마음으로 들어와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찬송가 간증이란다. 찬송가를 부르며 간증을 하고있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지라 그럴 수도 있나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찬송가가 끝나자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시가 흐르기 시작했다. 비파 연주에 맞추어 어느 때는 높고 어느 때는 낮으막한, 시를 읇는 여운이 가슴을 울리며 파고든다. 한참시가 흐르고 나면 또 다른 쪽에서 다시 시가 연속된다. 어느 것은 장엄하고 우렁차게 또 어느 것은 낮고 속삭이듯 주고받는 시가 계속되었다. 옆 형제에게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하니까 시(詩)를 한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들이 주고받는 낭송이 시라는 것을 알았다. 시편 몇 편이냐 물으니 성경 시편가운데 있는 시가 아니라 한다. 지금 시를 읇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영 안에서 주님을 찬양해 내는 찬송시라고 한다. 사실 난 그 때까지 성경에 찬송시라는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 성경 곳곳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마음에 감사함으로 서로 화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중국인들의 시를 짖고 낭송하는 실력은 대단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시를 배우고 지으며 낭독하는 것이 생활의 한 방면으로 자리한다. 외국인인 우리로서는 중국인들이 낭송하는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은유적이고 비유와 풍자가 가득하다. 중국 시는 서정적인 흐름과 은유를 내포한 산문조의 음률을 가진 노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깊다. 해설해 주는 형제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주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마음과 입을 통하여 주님을 표현하는 감칠맛 나는 찬송시의 의미를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시편의 그 많은 시들이 이렇게 읆어지고 낭송되었는가 싶으니 새롭게 느껴졌다. 우린 교회 안에서 찬송가나 부르는 것이 고작이다. 시와 시로 서로 화답하고 찬송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배인가가 새삼스러웠다. 성경에있는 이러한 실행들이 어찌하여 우리 가운데는 전달되지 않았을까. 처음 보는 중국 지하교회의 모습도 신기하지만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중국인 형제 자매들간의 교통은 더욱 신기하게만 보였다. 중국 형제들은 성도들간의 영적 대화를 교통이라한다. 주님이 주신 분량만큼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통하는 것들을 같이 나눈다는 의미에서교통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대화는 교제라고 한다. 수직간의 영적 교류를 교제라고 하는 반면 수평간의 흐름은 교통이라 구분한다. 수직간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형제들간의 수평적인 교통을 통하여 마치 세마포를 짜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엮어진다. 세상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듣고 본 일이 없다. 교회 안에서의 교통은 어색함이 전혀 없다. 물이 흐르듯 막힘 없는 영의 흐름이 있다. 이것이 끝나면 또 어떤 것이 나올까? 신바드 모험과 같은 신비함이 다가왔다. 찬송시가 끝나자기도가 시작되었다. 한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자 한 사람 한사람 꿇어앉으며 1-2분 정도의 짧고 간결한 기도들이 줄을 이어지듯 계속되었다. 모두 주님의 흐르심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그분의 능력과 보살핌에 감사하는 기도들이었다. 중언부언이 없는 그렇다고 경건한 단어를 쓰지도 않은 짧고 간단한 일상의 말들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찬송시까지는 어제까지 누린 주님을 찬양하고 말해내는 것이고 시작기도는 오늘 열려질 말씀들의 제목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오늘 집회 가운데 주님께서 들으시고 열어주실 말씀들을 기도로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 한다. 집회에는 예배 프로그렘이나 절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도하는 형제도 없다. 주님의 흐르심에 맡긴다. 어떤 형식이나 제약도 없다. 누구 하나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주님이 선포되고 말씀이 열리는 대로 흐르도록 할뿐이다. 자유 함이 있다. 살아 움직이는 흐르시는 성령을 볼 수 있다. 한참이나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옆 형제가 말을 걸어온다.
"형제님. 한국교회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저는 외국에 나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외국교회의 집회 모습을 보면 참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무엇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던가요?” “외국 교회가 모두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옷을 입고 앞자리 높은 곳에 올라가 혼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을 목사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목사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째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나요?” 나는 중국 형제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교회, 목사가 앞자리 높은 곳에 올라가 설교하는 것을 지금까지 한번도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어느 곳이나 그렇고 또 모두가 주목할 수 있도록 보다 높은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국 형제의 눈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이방인인 외국인에게 제일 먼저 물었을 것이다. 중국교회와 내가 보았던 교회와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다. 중국교회 안에는 높고 낮은 자가 없다. 모두가 형제이다. “형제님은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목사라면 말씀을 전하는 종의 신분일터인데 종이 어떻게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할 수 있습니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말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닙니까?” 이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들어왔다. 목사가 높은 곳에 올라가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생활 가운데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준이었다. 그것이 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상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오신 분 아닌가? 주님은 종으로 오셨다.종으로 오신 분의 자세라면 그 자세를 낮추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말은 섬긴다고 하면서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은 조금은 도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형제의 말은 무리가 아닐 듯 싶었다. 학교 선생님도 높은 곳에서 말하지 않느냐고 해보았다. 학교 선생님과 교회 목사와는 근본적으로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신분이나 지식적으로 모두 학생들보다 위지만 목사는 신분상 종이 아니냐고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중국교회에는 높은 곳이 없다. 모두평면이다. 이야기 하시는 분이 잠시 몸을 일으켜 세워 말씀하실 뿐이다. 형제는 이방인 친구인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으니까, 그것도 자기 나라 말이 통하는 외국인이니 얼마나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며 궁금할까? “형제님. 한국예배당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난 순간 이 중국형제가 아무리 궁금한 것이 많다고는 하지만 참 시시한 것도 물어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은 또 어떤 말을 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동시에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 걱정되었다. “어떻게 생기기는요. 예배당에 따라 넓은 곳도 있고 좁은 곳도 있지만 대개는 앞쪽에 말씀을 전하는 분이 서는 강대(講臺)가 있고 그 쪽을 향하여 의자를 진열해 놓고 앉아서 예배를봅니다.” “그래요. 그러면 예배당이 정사각 네모입니까? 긴 네모 모양입니까? “대부분 건물형태에 따라 다르지만 긴 네모가 많지요. 앞 강대를 보고 길게 의자를 놓으니까 자연히 긴 네모지요. 어느 곳은 체육관과 같이 둥근 곳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배당과 같이 정사각형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앞을 향해서 앉는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형제님. 지금 이 예배당을 보세요. 어떻게 생겼어요? 형제님이 다니는 예배당과는 다르다는 말슴이지요” “네모네요. 한국과 다르다면 한국은 말씀하는 이가 앞에서 전하고 그래서 앞을 보고 앉아있는데 여기는 가운데 네모진 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것이 다릅니다” “그래요. 중국 우리들 예배당은 네모졌고 가운데 네모 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예배를 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물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아세요 라는 말 뒤를 이어 그 형제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내 교회생활 25년 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난 그후 두고 두고 왜 그런지 아세요 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네모난 예배당은 바로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올 때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 지식, 그리고 주님이 아닌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는 이 번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은 태워져야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세로가 모두 같은 정사각형인 것과 같이 우리의 예배당도 사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번제단에서 주님이 아닌 우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들어와야 하며 지성소 안에 들어와 주님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운데 네모난 모양의 상은 우리 가운데 거하는 장막을 상징하며 빙 둘러앉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개 지파 씩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나온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설혹 이것이 하나의 그림자일지라도 실제를 갖고자 하는 뜻에서 그림자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예배당은 그저 성도들이 모이고 예배하기 편리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여기에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예배당을 준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다.그들 말대로 신앙이며 모든 생활을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성경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설사 행하는 것이 그림자일지라도 말씀 안에서 실제를 살아내고자 하는 소망이 엿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읽을 수 있었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만지지 못하였다. 예배당은 주님과 우리가 더불어 함께 나누는 자리이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만 생각했을 뿐 주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장소는 생각지 않았다. 주인이신 주님보다 종된 목사의 자리를 더 귀중하게 배려한 꼴이다. 집회장소가 네모지든 둥글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모이는 장소로서 족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집회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내게 오는 느낌은 달랐다. 집회소는 하나님의 성막이었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회막이었다. 주일날 습관처럼 드나들던 교회출석과 다르다. 지성소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닌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집회소 안으로 들어가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어두움을 가지고 참여할 수가 없다. 주님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관념일 수 있으나 주님을 본다는 경건이 따랐다. 그렇다고 집회장소를 신성시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집회 장소일 뿐이다. 육으로, 혼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보다 영 안의 깊은 교통의 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집회를 주관하시는 주님 생각하는 동안 집회는 계속되었다. 나의 관심은 여기 목사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으며 언제 말씀을 시작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전체의 주의를 받으며 말씀을 시작하려는 기미는 없었다. 단지 한 사람씩 일어나 짤막하게 주님을 찬양하고 간증하는 것들이 계속되었다. 많은 분들이 그침이 없이 계속 일어서 입을 여는 것이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상적이었다. 시작 기도의 내용이 그 날 집회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말씀은 그것이 확장되는많은 증거와 간증들로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어졌다. 참석한 사람들의 거의 반 이상이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 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내용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성경이 열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성경의 부분 부분을 퍼즐을 맞추어 가듯 이어간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국 교회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 기도이다. 모든 분들이 아주 주의 깊게 기도하고 기도내용에 특별히 귀를 기울인다. 처음 참석하는 나는 보통으로 하는 일상적인 기도이려니 생각했다. 한국교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판에 박은 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시작기도를 놓치면 그날 모든 집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회 시작 기도는 교회가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원하는 간구였다. 집회에서 주님과 대화할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회는 주님과 교회와의 실제적 대화였다. 시작 기도는 그날 집회소에서 주님께서 응답하실 내용에 대한 제목을 선포하는 기도인 셈이다. 시작 기도가 어느정도 종료되면 몇 분이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는 기도로 끝이난다. 이어지는 집회 내용은 교회가 주님께 간구하는 시작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주어지는 집회이다. 기도 내용을 중심으로 성경이 열리고 간증과 함께 기도들이 계속된다.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주님과 만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마치는 기도는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응답이나 다름없었다. 기도에 100% 응답하는 집회이다.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찬송과 환호, 찬양이 잇따른다.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신기한 것은 집회소 안에 성경이 몇 권이 안 되었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저는 어제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라고 시작하면 전체가 약속이나 하듯 요한복음 3장 3절을 같이 외우고 또 다른 구절을 대면 전체가 같이 그 성경구절을 외운다. 성경 전체를 모두 마음에 두고 외우고 있었다. “마태복음 5장” 하면 전체가 마태복음 5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 성경이 마음의 비에 기록되어 있는 듯 그침이 없다. 교회 안에 들어 온지 겨우 5년이 되었다는 옆 형제도 신약 전체를 외운다고 귀띔한다. 하나 하나가 성경이었다. 집회소 안의 성경은 전부 10여권에 불과했다. 성경을 들고 있는 이들은 모두 초신자들이다. 교회가 새로 온 분들을 위하여 배려한다. 나는 한동안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들이 왜 얼마 되지도 않은 성경 한 권을 못 살까 의문이었다. 성경 한 권이 우리 돈으로 1,300원에 불과하다. 최근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중화기독협회가 성경을 발간하여 값싸게 배포하고 있다. 그런데도 형제분들이 그 성경을 보시는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성경은 많은 부분을 개작하여 주님의 말씀을 변개시켰다. 온전한 성경은 구하기도 힘들고 비싸다. 1950년 이전 발행된 성경을 귀히 여긴다. 성경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것이 주님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과 벗하는 시간과 노력을 그만큼 줄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입을 열면 말씀이 포도송이처럼 연결되어 쏟아져 나온다. 말씀이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말씀을 사랑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듯 성경이 모든 것을 인도하고 있었다.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느낌은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예배는 한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전체가 참여하는 살아 숨쉬는 뜨거움이 있다. 자세히 들어볼수록 기이하다. 지금까지 한 사람이 말하는 교회에서 듣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하나님은 만유이시고 만유에 가득한 분이시다. 그 크신 하나님을 한 사람이 증거해 낸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유이신 하나님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한 사람이 증거하면 과연 얼마나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극히 일부의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짧지만 여러 사람이 말하는것을 계속 들어보니 점점 색다르게 다가오는 주님을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이 말할 때 들어보면 마치 코끼리가 큰 기둥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이가 일어서 코끼리는 긴 대롱과 같다고 말하고 아니 넓은 벽과 같다고 말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얘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얘기를 듣고 나면 코끼리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각자의 위치에서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 이야기를 종합해 가면 나중에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들어 나듯이 말이다. 퍼즐을 맞추어 가는 듯한 느낌 그대로였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간 너무 많은 선입관 속에 묻혀 살았다. 집회는 당연히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고 결론을 짖고 그리고 끝내는 것으로 알았다. 교회집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한번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 집회는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어디를 가시거나 해서 이렇게 때우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계속되었다. 중국교회 집회방식이 이랬다. 집회의 주인은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었다. 마치 운동장에 들어온 선수들이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활을 하는 것처럼 모두가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열광하는 것 같은 긴박감이 있다. 내 평생 처음 대하는 집회형식이라 옆자리에 앉은 중국 형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교회 집회가 언제나 이런 방식인가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솔직히 왕 같은 제사장이 무엇인지 몰랐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오직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궁금한 것은 나보다 중국형제가 더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어떻게 하는가를 되물어 온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집회를 하며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며 등등. 내가 경험한 한국교회의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마치 먼나라 얘기를 듣는 것과 같이 전혀 알아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처음 중국 형제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목사라는 사람이 혼자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자리에 앉아 듣는 것이 한국교회 아니 전 세계 대부분 교회의 집회일 것이라고 했다. 말이다 끝나면 기도하고 찬송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해주었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만 지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라는 내용이 없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두 명 이상의 형제들을 같이 보내시며 하나님을 증거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1900년대 초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단계에 있었을 때 한 사람이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말씀을 증거할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말하고 혼자서 집도하는 교회는거의 부패되었거나 타락하였다고 한다. 사람은 어느 곳이나 같다. 인간이 중심인 곳은 인간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교회 초기단계, 어린 자들이 중심을 이루는 교회는 인도하는 사람 중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집회이다. 때문에 말하는 이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로 이해하였다. 중국 형제들은 사람을 떠받치는 교회를 가리켜 사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지극히 어린 교회라고 말한다. 어느 교회든 사람이 주인 노릇하면서 부패하거나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그것이 곧 교회의 타락이요 부패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사람이 주장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이미 교회는 아니라는 표정이시다. 이러한 곳에는 왕과 신하는 있어도 형제는 없다. 왕은 아부는 좋아하지만 비판을 수용할 수 없다. 왕은 말 그대로 심판과 권세를 가진 자이다. 교회 가운데 누가 형제를 심판하며 군림할 수 있는가.주님께서도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왕들이 있어 형제를 판단하고 그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더럽히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주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주님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지도 않았을 뿐더러 주셨다 하더라도 혼자 감당할 수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한 쪽 면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주의 나라의 풍성을 가로막는 행위로 이해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필요 없는 세상 얘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고 반문한다. 생각해 보면 한국 교회에서 듣던 설교라고 하는 내용의 태반이 세상 이야기였다. 중국 집회에서 세상 예를 들어설명하는 성경말씀은 한마디도 듣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쓰레기 같은 세상 이야기로 설명을 해야 하는가 반문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말씀만으로 집회가 계속되어도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풍성하였다. 극치는 나중이었다. 어느 정도 말씀과 증거들이 다 나온 듯 싶을 때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몇 몇 형제분들이 일어나 “제가 정리하고 싶습니다” 또는 “보충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조금씩 빗나간 말씀이나 잘못 증거 된 말씀들을 정리하여 주신다. 간단하게 말하지만 전체를 요약하여 오늘 집회에서 나타난 주님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주듯이 정리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모자라다 싶으면 또 다른 분이 일어나셔서 또 다른 주님을 그려 주었다. 놀라운 그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나는 그저 “오 주여 이 사람의 눈을 열어 주님을 뵙게 하고 주님의 풍성한 상에 참여케 해주신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곤 난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증을 털어 냈다. “목사님이 누구세요. 왜 설교하는 분이 없으세요? 이것이 집회의 전부입니까?” “우리 중국교회에는 목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수발하는 어른 형제가 계시는데 주임(主任)형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번 집회도 이렇게 합니다.” 중국교회생활기 2부로 계속 |
감동적이네요
번제단과 지성소로 들어가는 예배의 모습이 아름답고,,중국교회의 앞날이 기대가 됩니다..
주님께서 중국교회를 사용하셔서 세계복음화가 속히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유모임도...이런 방법을 점목 시키는것이 좋을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주말에 일하러 회사 나온 길에 습관적인 써핑으로 들렀습니다.
출근길 극동방송의 깊은뜻교회 목사님의 말씀으로 한 방 먹었다가(7년째 종의 마음), 미정 순장님 글 보고 두 방째 먹었습니다.
저희 애오개도 퍼갈께요 ㅋ
2부 이후는 제게 멜로 보내 주실라우?(dwjung@seoulshinbo.co.kr)
역삼모임에 있을 때 어느 한 형제가 중국교회 단기선교 보고를 할 때 쇼크 먹었던 것이 다시 되살아나네요.
저의 다음 선교비전이 중국인데, 얼렁 가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겠어요 ^^*
네...정말입니다....
나는 그래도(?)그저 일상적인 예배는 드리지 않는다고 착각 하며 교만한.....
하나님께서 중요한 메시지와 도전을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노원에도 퍼갈꼐요....감사합니다.
앗....저는 노원모임의 이언주 자매입니당^^
임마누엘!!!!